한국 농부가 발견한 돌덩이 글자 때문에 일본이 긴장하고 있는 이유

  						  
 								 

한국 농부에 의해 발견된 돌덩이가 일본 정부를 긴장하게 하고 있다.

1988년 울진 봉평리의 한 농부가 논일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 큰 바위가 논에 박혀있어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됐다.

농부는 바위를 뽑아내어 마을 빈터로 옮겼고 마을 주민들은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바위에 묻어있던 흙이 씻겨나가면서 감춰져있던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을 이장은 즉시 울진군청에 알렸고, 울진군청은 경삭북도에 감정을 요청했다.

감정 결과 해당 바위는 바위가 아니라 비석이었으며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해당 비석은 신라시대 법흥왕 11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됐다.

이 비석으로 인해 그 당시 신라의 문체와 시대상 등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비석에 기록된 내용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었다.

높은 가치를 인정받은 이 비석은 발견된 지명을 따 ‘봉평리 신라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다. 또한 대한민국 국보 제24호로 지정됐다.

봉평리 신라비는 신라의 17관등의 설립연대와 지방통치조직 및 촌락구조, 복속민에 대한 시책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여러 면들을 재검토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또한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라 신라만의 독특한 한문체가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봉평리 신라비가 발견되기 전까지 신라식 한문체에 대한 기록은 전해진 바가 없었기 때문에 봉평리 신라비는 신라의 문체를 연구하는 데 엄청난 역할을 했다.

비석에는 “울진 지방이 고루려에서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뒤 신라가 군사를 일으켜야되는 어떤 사건이 울진에서 발생했고 법흥왕이 이를 진압토록 했다”고 새겨져 있었다.

이를 통해 광개통대왕릉비와 유사한 기법으로 제작된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비석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됐으며 가야와 신라가 왜의 영향을 받아 발전할 수 있었다는 일본의 터무니 없는 주장을 완벽히 반박할 수 있게 됐다.

해당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은 “우리나라는 자연스럽게 유물을 발견해내고, 일본은 살그머니 묻었다 파내면서 발견했다 쇼를 하고”, “앞으로 정말 어마어마한 유물들이 나올 것이다”, “일본 어떡하냐”등의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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