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윤치호? 도산 안창호? 애국가 작사 논란, 누가 썼을까?

2017년 October 19일   admin_pok 에디터

해방된지가 70년 가까이 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렇다면 진짜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인가?

1. 윤치호

미국 에모리대에 보관되어 있는 애국가 가사.

1945년에 쓴 자필 가사지 옆에는 윤치호 라는 이름이 쓰여져 있다.

친일파 중 탑클래스 10인 중에 포함되는 친일파 중 친일파.

이 사람이 애국가를 작사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 국민들은 큰 자괴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신대 역사학과 교수 김준혁)

윤치호.

한국 최초의 코스모폴리탄.

18살에 신사유람단을 따라 나섰고 중국과 미국에서 유학.

초대 주한미국공사의 통역관으로 국제정서에도 매우 밝았던 시대적 인물.

<아래는 그의 일기이다.>

60년에 걸처 거의 매일 영어로 일기를 써왔다.

박스로 10상자 정도 되며 내용은 매우 매우 디테일하다.

비참한 나라가 되느니 차라리 식민지가 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윤치호.

그는 결국 윤치호란 이름을 버리고 이토 치코가 되었다.

그리고 총독의 직속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참의 고문으로 활동.

천황의 임명으로 칙임위원이라는 최고의 직위를 받았다.

그렇다면 이런 친일파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것일까?

에모리대에 직접 방문했던 안민석 의원.

몇가지 의문점을 품게 되었다는데…

우선 필적을 비교해 보았다.

애국가 가사지와 일기장의 필체를 대조.

필적 감정 결과 4군데 중 3군데는 윤치호의 일기장과 애국가 가사지의 필체가 동일인에 의한 필적으로 감정되었다.

안익태가 작곡한 것은 1935년.

작사는 훨씬 더 이전부터 전해져 왔는데…

찬미가라는 이 책에 (1908년 발행) 바로 그 애국가 가사가 쓰여져 있고..

지금의 애국가 가사지 중 가장 오래 전 1908년에 발행된 이 책은 윤치호가 낸 것.

1908년 이 찬미가와 더불어 1945년은 에모리대에 보관 중인 애국가 가사지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다…라는 증거가 되고 있다.

1910년 신한민보에도 윤치호라는 기록이 있다.

193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발행한 찬가집도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나와있다.

심지어 1914년 외무차관은 이런 보고서를 보내기도 했다.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가 미주 지역에서 불리고 있다는 내용.

그렇다면 일본 황제에게 칙임위원까지 임명되었던 이런 윤치호가 정말 이렇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가사를 썼을까?

공식적으로 나타난 활동만 해도 그의 친일 행적을 그냥 덮을 수 없는 수준…

근거도 안 되는 거 내세우면서 칠일 행적을 덮으려 한다고…

분노하시는 위원장님.

1-1 그렇다면 윤치호에 관한 여러 문서는 과연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윤치호가 원 작사가라는 증거가 되는

1908年 찬미가

1914年 일본의 외교문서

1910年 신한민보

1931年 찬가집은

그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윤치호가 에모리대에 보관된 가사지를 쓴 이유는 윤치호 딸이 아버지인 윤치호를 찾아왔을 때 딸의 부탁으로 윤치호가 써 준 것이라고 하는데…

윤치호 딸 이름이 문희 왜 하필 그 시기 1945년 9월.. 해방시점에 써 줬을까?

안민석 의원의 해석.

해방된 1945년 9월은 해방이 된 지점으로 친일을 하던 윤치호는 해방이 매우 두려웠을 것.

그래서 친일 행적을 희석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닌가?

그 무렵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도 좀 묘하다고 한다.

그리고 1908년 발행된 찬미가에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윤치호가 역술자라고 나와있다.

이 교수님의 관점은

역술은

윤치호가 지은 것이 아니라 그저 번역한 것이라고.

왜냐하면 본인이 지었으면 저작이라는 표현이 있어야 하며

1908년도 그 시대에는 본인이 지었다면 저작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윤치호는 1908년 발행된 찬미가에 애국가 가사에 대해서 저작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즉 윤치호가 이 책에 애국가 가사를 썼다고 해서 윤치호가 작사가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찬미가에는 애국가 외에 다른 찬송가 13곡이 번역이 되어 있다는 것이 그 근거.

이 분은 찬미가에 나오는 가사들은 의역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윤치호가 직접 지은 것으로 보기 힘들다는 입장)

역술자 윤치호

또 가장 이상한 점은 바로 일기장.

평생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말 디테일하게 썼다.

디테일이 어느 정도였냐면….

윤치호는 부자였음에도 아주 적은 돈까지 상세하게 다 적을만큼 디테일의 왕이었던 것.

그런 윤치호가 일기장에 애국가를 썼다는 얘기는 단 한 줄도 언급이 없다.

안민석 의원도 역시 이 점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다.

또 하나의 일화

1919년 3월 1일

성난 민심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광경…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외치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일기에 이러한 글을 남겼다.

일기 그 어디에도 자신이 지은 애국가에 대한 글은 단 한 줄도 없었다.

애국가가 길에 울려 퍼졌음에도 일기에는 그냥 이런 내용이 전부…

직접 쓴 노래라면 그렇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까?

왜 일기장에 한 줄도 쓰지 않았나?

(그렇게 디테일한 사람이…)

2. 도산 안창호


이 분은 안창호의 외손자 필립 안.

외할아버지인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의 작사자라고 주장.

안창호의 부인, 즉 필립 안씨의 할머니로부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들었다고.

안창호의 맏딸.

아버지가 애국가를 썼다고 알고 있다고 말씀하심.

그러나 연세가 100세…

더 이상의 대화는 힘들었다.

도산 안창호의 비서실장 구익균.

구익균씨는 도산 선생에게 직접 물어봤다고 한다.

윤치호처럼 문서적인 자료는 없지만 사람들의 증언은 꽤 구체적이다.

1907년 평북 선천에서 있었던 일.

예배당에서 “백두산이… 두만강이…” 이런 찬미가가 불려졌고 이것을 들은 도산 안창호가 영감을 받음.

(윤치호의 찬미가는 1908년 발행으로 안창호의 일화가 1년 더 앞선다.)

예배당에서 들었던 두만강을 동해물로 바꾸고 사계절을 테마로 바꾸어 찬송가를 지어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애국가의 원형이라는 것!

윤장경씨는 독립운동을 했던 집안 어른들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라고 한다.

안창호 선생이 평양을 거쳐 서울로 내려 간 뒤 15일 후에 이러한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가 만리 현 의무균명학교에서 학생들과 매 조회 때마다 애국가를 부른다… (1907년)

(윤치호의 찬미가는 1908년)

안창호의 제안으로 애국조회가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진짜 작사가는 윤치호냐 안창호냐?

그렇다면 왜 아직 학계에서는 애국가 작사가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았나?

2-1 학계의 상황

1955년 일찍이 정부에서도 애국가 작사자를 찾기위한 심의위원회를 열었는데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때 위원장이 친일파 최남선.

(윤치호와 친분이 있는 사이)

조사위원회는 다 친일파 출신.

상당한 의도가 있다고 보는 이유

이승만과 안창호는 미묘한 갈등이 있어왔는데…

안창호의 외손자인 필립 안씨는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1955년 애국가 작사자 규명위원회는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보심.

3. 도산 안창호와 윤치호의 연결고리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한 일본 영사관으로 한장의 보고서가 도착.

그것은 조선인 학교에서 압수한 노래책에 대한 내용.

대성학교 학도 중 누군가가 지었다고 압수된 노래책의 첫머리에 애국가가 실려있다.

평양 대성학교에서 이미 부르고 있었던 것.

평양 대성학교는 안창호와 윤치호를 연결할 수 있는 고리이기도 하다.

이 대성학교는 원래 안창호가 실질적인 교장이었으나 안창호는 자신이 세운 학교에 윤치호를 교장에 앉혔다.

두 사람이 만난 1907년은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해이다.

교육을 통해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이 조국 독립을 위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안창호와 윤치호.

두 사람은 개성과 평양에 각각 학교를 세우고 다양한 애국찬가를 보급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런데 왜 그 둘은 결국 다른 길을 가게 되었는가?

3-1 위험한 생각

데라우치 총독 살인 미수 사건.

있지도 않은 살인 미수 사건의 배후에 윤치호가 지목이 된 것.

(윤치호는) 결국 3년간의 억울한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 후에 윤치호는 일제에 순응하지 않았겠나…

출소 후 공식적인 노선변경을 알렸고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했으나 윤치호는 단호히 거절.

그러나 이 무렵 윤치호의 일기를 보면 눈꼽만큼의 갈등이나 후회는 전혀 찾아보기 힘들다.

이미 독립운동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결론을 내린 상태.

(일기가 정말 대박입니다.)

민중을 거지로 표현.

윤봉길을 가리켜 비열한 공산주의자로 매도.

윤치호의 생각은 문명화를 해야 힘 있는 나라가 된다.

약소국은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힘을 기르지 못한 우리탓이지 제국주의를 탓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 살기만 하면 뭐든 된다는 효율 지상주의로 식민지 지배까지 정당화 하는 위험한 생각으로 빠졌고

결국 윤치호는 아주 전방위적으로 친일 행적을 남겼다.

심지어는 일본의 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할 수 있는 것 조차도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쳐라고 글을 쓰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출발점이 같았던 안창호는 윤치호와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나?

안창호는 정의가 힘이고 정의를 세워서 제국주의를 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 윤치호처럼 잘 살기만 하면 뭐든지 괜찮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상해임시정부가 윤치호의 이런 변화를 모르지 않았을 터.

만약 애국가를 윤치호가 지었다면 상해임시정부가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만약 애국가 가사를 윤치호가 지었다면 김구 선생이 이를 모르지 않았을 터.

절대로 인정치 않았을 것.

4.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노래

(제일 중요한 부분)

1899년 배제학당 입학식.

(조선은 대한제국이므로 황실이라는 단어가 있다.)

1899년에 무궁화 노래를 불렀는데 후렴이 지금의 애국가와 같다.

1899년 무궁화가로 불린 노래 이미 지금 애국가의 후렴구가 있었다!

(윤치호의 찬미가는 1908년)

그리고 배제학당 1899년보다 2년 앞선 1897년.

독립협회의 개최로 열린 조선개국기원절에서도 무궁화 노래가 불렸다.

(이미 윤치호나 안창호가 작사를 하기 전 )

1890년대에 애국가 제정운동이 있었고 민족학교나 민족교회에서 애국가를 불렀었다.

수많은 애국가들.

애국가 제정운동으로 1896년 시기에 수많은 애국가들이 독립신문 및 다른 언론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이미 이렇게 가사가 있었다.

즉 앞부분은 조금씩 달라도 모든 애국가의 후렴은 같았다.

즉 기본의 틀이 있었고 상황에 맞게 단어를 고쳐서 지방에 따라 변형되서 불려졌을 것이다.

한일 강제병합 1년 뒤에도 무궁화 노래가 불려졌으나 가사는 달랐다.

1911년에는 국민이라는 단어가 등장.

(고종) 황제 —-> 국민. 민족

조금씩 가사의 개선이 이루어진 걸로 보시는 관장님.

노동은 교수의 스크랩.


1904년에 이미 동해 수와 백두산…. 마르고 닳도록… 기록이 있다.

즉 윤치호의 찬미가보다 4년 앞선 기록이 있다.

아래는 애국가를 연구하던 한 서지학자의 제자.

스승님이 돌아가시면서 고문서를 몽땅 다 받으심.

스승님께 자료를 받긴 했는데…

무슨 자료가 있는지 잘 모르시는 상황.

자료가 무지하게 많음.

열심히 찾아보니

지금의 가사와 거의 똑같다.

(엄청난 기록을 발견)

갑진초하.

1904년 여름.

더 흥미로운 자료가 있었는데…

구한 말의 필사본.

이 책은 과연 언제 누가 쓴 것일까?????

맨 뒷장에 적힌 날짜 1903년.

애국충성가에도 뒷장 교가에도 황제라는 말이 나온다.

즉 이것은 대한제국시대 때 불렀던 교가.

<대한제국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의 조선의 국명>

만약 이 가사가 을사늑약 후라면 이렇게 쓸 수 없다.

즉 이 책은 상황적으로 1903년이 맞다고 본다.

따라서 1908년 찬미가에 나오는 애국가 가사를 윤치호가 지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

구한 말에서 식민지 시기를 거쳐 해방까지 애국가는 우리가 알기 훨씬 오래 전부터 더 많은 사람들을 거쳐 전해졌을 수도 있다.

출처 – 그것이 알고 싶다 누가 썼는가? 애국가 작사 미스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