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를 하느니 성매매를 하라” 나치 독일의 성문화

2017년 November 3일   admin_pok 에디터

기본적으로 나치 독일은 “제국성병박멸법(das Gesetzz ur Bek mpfung der Geschlechtskrankheiten)” 을 적용하여 성매매를 단속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매매 자체를 근절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장차 독일 제국의 영토 확장을 위해 싸워야 할 우수한 독일 국방군이 “성병” 따위로 손실을 입어서는 안된다는 비전투손실의 방지 차원이었다.

또한, 독일 여성들은 어디까지나 독일 제국을 떠받치고 우수한 혈통을 낳기 위해 건강 유지의 의무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결혼 이외의 성매매 등은 철저하게 단속되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독일 여성의 성매매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장애가 있거나 정신병이 있는 자는 T4 작전에 의해 일체가 말소되었다.

독일 교련에서 체력적, 신체적으로 탈락하는 여학생들이 가는 곳은 또 따로 있는데 그건 조금 뒤에 설명하도록 하겠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싫어했던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 생략한다 치더라도, 유태의 피가 아주 조금이라도 섞이는 것을 꺼려한 나머지 나치 독일 집권 초기에는

“유대인들이 돈으로 순수한 독일 제국의 젊은 여성들을 매수하려 하고 있다”

이런 식의 선동이 버젓이 신문에 올라오곤 했다.

그래서인지 나치 독일 하의 성매매 및 성병 통제는 특이하게도 SS 친위대장인 하인리 히믈러가 떠맡게 되었다.

1937년부터 히믈러는

“성매매보다 군 내부에 만연하는 동성애를 박멸하라!”

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를 위해서는 각 주둔지에 군이 가격을 통제하는 성매매 업소를 선정하여 운용하도록 했다.

이미 1차 대전에서 2백만명 이상의 성병 환자를 만들었던 뼈 아픈 경험 때문에 나치 독일에서는 특히 성병의 예방에 정열적이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프랑스 물랭 루즈 쇼의 2차 대전 당시 멤버들.

그래서 콘돔의 지급은 물론이고, 특이하게 성병에 걸리면 일본처럼 여성을 내치는 게 아닌, 걸린 독일 병사를 내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점령을 기점으로 1942년에 이르기까지, 나치 독일은 각 점령지에 총 500개소에 달하는 독일군 전용 위안소를 만들었다.

독일 병사가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여성들이 관리가 잘 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절대로 길거리의 여성보다 가격이 비싸지지 않도록 군 주도하에 성매매 가격을 통제했다.

일반 위안소의 경우 입장료로 2~3 제국마르크(지금 원화 가치로 약 2~3만원) 을 받았고, 고급 위안소는 5마르크 정도를 받았다.

보통 길기리에서 7마르크 이상을 받던 기준을 생각하면 저렴하다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술과 여자가 풍족하게 보급되는 프랑스의 클럽이나 살롱을 개조한 곳은 고급 장교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히믈러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군에서 사용 가능한 시설만을 이용할 것을 지시했지만 사실 이 지시가 잘 지켜지는 편은 아니었다.

소위 고급 창녀라 일컫는 여자들은 다 고급 장교들이 선택해갔고, 일반 병들이 이것에 대해 순순히 받아들일 리는 만무했다.

상관의 명령보다도 강력했던 것이 인간의 성욕이었을까.

그래서 점령지 강간을 금지하고 있음에도 일반 병사들은 각 점령지에서의 강간, 특히 유대인 여성이 발견되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신나게 강간하고 죽이는 것이 일종의 오락거리였다.

그래서 점령지에 독일군이 들어섰다하면 점령지의 여성들을 정상적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거의 전무했다.

모든 나치 독일 하의 군 지정 위안소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준수해야 했다.

1) 여성의 강제 등록제

2) 경영자와 성매매 여성의 수입 배문은 반반

3) 이용 요금은 군의 통제에 따른다

4) 콘돔의 필수 사용 및 사용 후 성기의 소독

5) 주류 반입 금지

6) 성매매 여성에 대한 폭력 금지

7) 헌병에 의한 감시

8) 성매매 여성의 외출 제한

해당 지시들은 상당히 엄격하게 집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처형된 사람들도 많았다.

이와 같은 군 통제하의 성매매 개입으로 1차 대전에 비하면 극단적으로 성병 환자가 줄어들었다고 나치 독일은 선전했지만,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없어서 반드시 신뢰하기는 어렵다.

또 나치 독일은 각 수용소 내에서도 이러한 위안소를 설치했다.

강제 노동을 하다 죽을 운명인 이들에게 왠 여자냐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나치 독일은 동성애를 매우 혐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성애자가 나오게 만들 바에는 차라리 수용소 안에 위안소를 만들어서 노동자에게 사기를 진작시키자는 의견이었다.

주로 이 위안소로 끌려오는 여성들은 위에서 설명했던 오디션에 탈락한 독일 여성 및 여죄수들이었다.

물론 수용소 내에 근무하는 독일 장병들은 그들이 원하는 보통 이상의 성접대를 보장 받았지만

수용소 죄수들은 병들고, 정상적인 건강상태가 아닌 여성들과 관계를 가져야했다.

물론 전쟁 말기가 되어 패색이 짙어지자 각지에서 미망인들과 고아들이 하녀나 식모 살이를 하다가 성매매 여성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독일군 점령 하에서는 독일 장교들에게 성접대를 다해주다가

독일의 패전에 의해 유럽이 해방되고 나서 묵었던 문제가 터지기 시작되었다.

나치에게 몸을 팔았던 여성들은 각지에서 강제 삭발 당하고 나체로 시내를 끌려다니는 등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