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권리가 높고 개방적이었던 고려의 성문화

2017년 November 8일   admin_pok 에디터

초기 태조왕건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와 왕권안정을 위해 각 지방호족들과의 혼인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자녀들이 무려 남자 25명, 여자 9명.

그후 이런 혼인정책은 족내혼(근친혼)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고려 3대 정종은 견훤의 외손녀들과 결혼.

이 친자매는 태조 왕건의 17대 부인 박씨의 친동생들이다.

결국 정종은 이모들과 결혼한 셈이다.

근친혼과 개방적인 성문화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왕실뿐만 아니라 서민사회 , 즉 고려사회 전반에 걸쳐 지배했다.

송나라 휘종이 고려에 국신사(國信使)를 보낼 때 수행한 서긍이 송도에서 보고 들은 것을 그림을 곁들여서 기록한 책이 고려도경이다.

이 책 23권을 보면 여름철에 시냇물에서 남녀 구별 없이

옷을 벗고 목욕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또 아예 경합이리(輕合易離)라고 하여

“가볍게 만나서 쉽게 헤어진다.”

는 기사가 나올 정도다.

송나라 사신의 기록이므로 신빙성에 의문이 있지만 고려의 성 풍속이 개방적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조선 초기 김종서, 정인지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만든 고려시대의 역사책인 고려사를보면 곳곳에서 여자들이 절에 가서 술 먹고 춤추고 놀아 풍기가 문란함을 지적하는 기사가 많이 나온다.

고려시대에는 여성들의 재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임금 중에는 이혼한 여자와 결혼한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6대 왕이자 유학정치이념의 실천자인 성종(태조 왕건의 손자)은 역시 태조왕건의 손자이자 광종의 딸인 문덕왕후 유씨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역시 태조의 다른 손자 왕규에게 결혼을 했다가 성종에게 재가한 경우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있었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개방적인 성풍속은 고려속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작품은 충렬왕 때의 가요인 쌍화점(雙花店)이다.

모두 4절로 된 이 노래는 당시의 퇴폐적인 성윤리가 적나라하게 잘 나타나 있는데, 유창한 운율과 아울러 봉건시대의 금기이던 왕궁을 우물로, 제왕을 용으로 표현한 점 등은 뛰어난 기교라 하겠다.

내용을 보면 쌍화점에 쌍화(만두)를 사러 갔다가 회회아비(아라비아인)가 목을 쥐고, 삼장사에서는 주지가 손목을 쥐고, 우물에 물 길러 갔더니 용이 손목을 쥔다는 것으로 당시의 성풍속을 가감 없이 표현하였다.

이 작품이 조선 성종 때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또는 음사(淫辭)라 하여 배척을 받았을 정도라고 하니 그 표현의 수위를 짐작할 만하다.

충렬왕 때는 원나라의 축첩제도가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때 박유가 나서서 일부다처제를 왕에게 권한다.

그가 임금을 호위하여 연등회를 갈 때 어느 할머니 하나가 나서서 “축첩을 청한 자가 저 늙은이다”고 소리쳤다.

이 소리를 듣고 서로 전하여 손가락질 하니 온 마을에 붉은 손가락이 다발을 이루었다고 한다.

결국 박유가 건의한 축첩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유가 뭇 여성들의 공격대상이 될 정도로 일부일처제는 그런 대로 지켜지고 있던 것 같다.

고려사에는

“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부인을 하나만 거느리고 아들이 없는 자도 감히 첩을 두지 않았다”

는 대목도 나온다.

실제 축첩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논란의 대상이지만 고려때는 남녀관계의 균형이 유지된 사회였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성풍속은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급격하게 남성중심으로 바뀐다.

고려 말기 안향이 주자학을 들여오고 조선이숭유억불 정책으로 유교(유학)를 장려함으로써 남녀의 성역할이 구분되고 남녀차별제도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