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극우들에게 배신자로 불리는 일본의 친왕

  						  
 								 

일본 극우파에게 배신자로 불리는 일본의 왕족.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1915년 12월 2일 ~ 2016년 10월 27일 (향년 100세)

일본 왕실의 상식인, 일본 지도층 가운데 2차 대전부터 타계할 때까지 극우들에게 배신자 빨갱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상식과 양심을 지킨 드문 인물이다.

“조선인 학살 기억하자” “식민지배 반성해야”

 

그는 일본의 왕족으로 태어났는데, 왜 배신자라고 불리는 걸까?

 

먼저 다카히토는 다이쇼 덴노의 4남(막내)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큰형은 원자폭탄을 맞고 인간 선언을 한 쇼와 덴노이다.

여담으로 쇼와 덴노는 이봉창 의사가 1932년 일왕이 탄 마차를 노리고 폭탄을 던진 사쿠라다문 의거에서 폭탄 하나는 말과 마부만 부상을 하나는 불발이 되어 실패했기에 운 좋게(!)살아남은 자이다.

 

더글라스 맥아더와 쇼와 덴노. 

이후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한 일본은 GHQ(연합군 최고 사령부)에 의해 인간선언을 발표한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다카히토는 친형인 쇼와 덴노와 14살, 다른 형들과도 10살 차이가 나는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왕위계승 가능성이 매우 낮았기에 비교적 행동반경이 자유로웠다.

그는 커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거쳐 군인이 되었고 중일전쟁때 중국에서 복무하다, 대본영(일본군 육군 및 일본군 해군의 최고 통수기관)참모로 전출되면서 귀국한다.

 

그는 귀국한 뒤 전쟁 종결을 모색하다가 동료들과 함께 도조 히데키 내각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 계획을 세운다.

이 쿠데타는 주전파로 분류된 도조 히데키 이하 일본 장교들을 처단하고 다카히토가 지나 파견군(중국 장쑤 성 난징에 본부를 두고 중일전쟁에 참전하는 모든 육군을 총괄하는 부대) 총 사령관에 취임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하지만 다카히토는 동료인 쓰노다 등이 도조 히데키를 암살하고 수백 명의 주전파를 모두 숙청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에 반대하면서 의견 차이가 생겼고, 결국 다카히토는 쓰노다를 헌병에 자수하여 쿠데타 계획을 뒤엎는다.

다카히토는 이 사건에 관여한 것은 분명했지만 불문에 붙여졌고, 대신 육군기갑부대로 전출된다.

이후 일본은 항복했고, 그는 도쿄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고고학, 중동 역사 등을 공부하며 역사학자라는 분야에서 활동한다.

 

노년의 다카히토.

 

다카히토는 1950년대 후반 일본에서 기원절의 부활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자, 학자적 입장에서 진무 덴노(일본의 초대 덴노)의 역사적 사실성을 부정하여 반대하는 입장에 섰으며, 1959년에는 “거짓을 말하는 자가 애국자로 칭송받고, 사실을 말하는 자는 매국노로 매도당하는 세상을 나는 경험했다”는 등의 말을 한 <일본의 새벽 : 건국과 기원을 둘러싸고>라는 책도 간행한다.

이때부터 그는 극우세력으로부터 빨갱이 왕자님이라며 그를 왕적에서 파낼 것을 대놓고 요구한다.

그는 또 언론 매체를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행위에 대해 한국과 중국에 사과를 해야한다”고 주장했고, <동방학 회상>이란 책에서는 지난 전쟁 시기를 회상하는 장면을 통해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비판했다.

 

특히 1998년 중국의 장쩌민 주석 방일 당시 궁중연회 자리에서 “중국인들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발언도 했는데, 난징대학살 희생자 수에 관해 남긴 어록이 화제였다.

“일본군이 그 이름에 반하는 행위(폭행, 약탈)를 하고 있는 지금은 현지인으로부터 존경 따위 받을 리 없다. 지금의 황군에 필요한 것은 장비도, 계획도 아닌 반성이다. 스스로를 돌이켜 스스로를 삼가고 일거수일투족이 큰 뜻에 어긋나지 않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볼 것”

“피해자 수가 논의되고 있다고 하지만, 수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학살이 이루어진 것 자체가 문제이지” 

1970년과 1989년에 부부동반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이은 부부의 장례식 참석차 한국을 비공식 방문한 적도 있다.

그는 이렇게 일본에서 신격화를 받던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2차 대전부터 타게할 때까지 상식과 양심을 지키며 살았다.

다카히토의 가족사진.

다카히토는 100살의 나이까지 장수했지만, 그의 아들들은 60대 초중반에 일본의 평균수명보다 일찍 죽는 아픔도 겪는다.

장남은 2012년에 차남은 2014년에 삼남은 2002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때문인지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며 급성폐렴 등으로 입원하더니 2016년 병원에서 타계했다.

*우리나라에 알려진 몇 일화 중 731 부대 재직 중 “이번 실험을 중립국에서 얼마나 살아남는지를 보는 실험이다”라며 포로들을 살려보낸 일화는 731부대에서 복무했다는 자료가 하나도 없기에 낭설이라고 한다.

*3대 오물. 무타구치 렌야를 지적한 사건으로 알려진 것도 낭설이다.

2017. 11 저작권자(c) 지식의 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