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재미있는 한국 정치판, 김무성 ‘옥새런’사건

2017년 November 30일   admin_pok 에디터

김무성이 박근혜한테 날린 빗역사건인, ‘당 대표 직인 날인 거부 사태’

이 사건은 ‘옥새투쟁, ‘옥새런’, ‘런무성’, ‘무성이 나르샤’등 다양한 이름의 사건으로 남았다.

 

먼저 김무성은 전두환 정권 시절 ‘김영삼’이 통일민주당 총재였을 때, 그의 신임을 받으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2004년엔 ‘한나라당’으로 이름이 바뀐 정당의 대표 ‘박근혜’의 신임을 받아 사무총장을 하는 등 당의 살림을 총괄한다.

 

이렇게 김무성은 ‘박근혜’를 주축으로 하는 ‘친박계’의 핵심이 되었고,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를 위해 뛰었으나, 경선은 ‘이명박’이 승리했고, 이명박은 2007년 17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자,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기세등등한 ‘친이계’는 ‘친박계’를 ‘공천 학살’로 모조리 탈락 시킨다.

이때 공천을 받지 못한 친박계들은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고, ‘친박 무소속 연대’라는 이름으로 선거에 나간다.

 

김무성도 마찬가지로 탈당 후 ‘친박 무소속 연대’라는 이름으로 출마하여 당선이 되었는데, 여기서 김영삼은 과거 신임하던 김무성의 선거구를 찾아서 지원 유세를 해주기도 했다.

여기서 김무성은 무소속으로 당선됐는데, 다시 ‘한나라당’으로 복당을 한다.

여기서 ‘친박계’의 리더인 박근혜와 ‘친박계’의 핵심인 김무성과의 사이가 점점 틀어지게 된다.

어떤 사건이냐면 ‘친이계’가 탈당 후 출마하여 당선된 김무성을 복당시키면서 ‘원내대표’를 제의했을 때, 김무성은 이 제안을 수용했지만 박근혜는 이 제안을 부정적으로 봤었다.

그런데 김무성이 수락하자 사이에 점점 금이 가기 시작한 것.

 

게다가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특별자치시 수정안’을 들고 나왔을 때도, 김무성은 이를 지지했으나, 박근혜는 ‘수정안’을 반대했고 이렇게 두 사람의 의견이 자꾸 틀어지자 사이에 완전히 금이 갔다.

이 두 가지 사건 등으로 김무성은 완전히 ‘친박’에서 ‘비박’으로 돌아서게 된다.

사실 위 두 가지 사건 외에도 박근혜-김무성은 의견 충돌이 수시로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친박계는 리더 박근혜, 조직 김무성, 정책 유승민의 삼각편대였는데, 리더인 박근혜는 상명하복식 관계를 생각했으나, 김무성은 수평적인 동지 관계를 생각했었고 때문에 의견을 두고 충격이 자주 일어났으며,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김무성은 ‘친박’에서 ‘비박’의 길을 걷게 되었고..

 

2011년 ‘재보궐 선거 디도스 테러 사건’으로 한나라당 대표인 홍준표를 비롯 당 핵심위원들이 연이은 사퇴를 하자 한나라당은 비상대책위원회 체재에 돌입한다.

여기서 박근혜는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다시 당권을 잡는다.

‘비박’으로 돌아서 미움을 받던 김무성은 2012년 이제는 ‘새누리당’으로 바뀐 정당의 19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에서 탈락한다.

이때는 ‘친이계’를 포함 ‘비박계’가 공천 학살을 당했는데, 김무성은 공천에서 탈락한 약 30명의 의원을 모아 ‘신당’을 창당하려다가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낮다고 예상. 이번에는 탈당하지 않고 당에 남는다는 결정을 한다.

당의 결정에 따른다며 당에 남았지만 19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못했던 김무성은 2012년 18대 대통련 선거에서 ‘박근혜 캠프’의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아 일을 하면서 관계 회복에 집중했다.

 

201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가 열렸을 때, 김무성은 무려 65%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국회로 복귀한다.

다음해인 2014년 김무성은 ‘친박계’를 대표하는 서청원을 이기고 새누리당의 수장에 오른다.

여기서 생긴 별명이 ‘킹무성’

그는 당대표 초기 ‘박근혜 정부’와 의견 차이가 있어도 자신의 의견을 예전처럼 내세우지 않았는데, (이때 그의 별명인 ‘무성대장’의 이름이 아깝다라는 소리도 나왔다.)

같은 비박계인 유승민이 새누리당의 원내대표로 선출되면서 유승민과 함께 조금씩 자신의 의견을 내세웠다.

 

하지만 원내대표였던 유승민은 위 사건 등으로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김무성은 다시 박근혜 정부에게 한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16년만의 ‘여소야대’ 20년만에 3당 체제가 된 ’20대 국회의원 선거’

당대표인 김무성을 비롯한 ‘비박계’는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상향식 공천’을 주장한다.

사실 김무성은 ‘완전 국민 경선제’를 원했지만, 친박계가 이를 견제했고, 결국 ‘완전 국민 경선제’는 포기했으나 국회의원 후보를 아래에서 위로 공천하는 방식의 ‘상향식 공천’을 통해 민주적인 공천을 뿌리내려야 한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때 ‘친박계’는 위에서 뽑는 ‘전략공천’과 다름없는 ‘우선 추천식 공천’을 주장했는데, 김무성이 친박계가 주장하는 공천 방식을 반대한 이유는, 그 역시 2번이나 공천 학살을 당했던 경험이 있었고, 박근혜 정부와 친박계의 압박에 ‘공천관리위원장’도 자기 마음대로 임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천위원장 ‘친박계’ 이한구.

이한구는 20대 총선을 앞둬 ‘공천관리위원장’으로서 영향력이 매우 컸는데, 그는 “당대표도 공천 심사를 받아야 한다”면서 김무성 대표와 비박계를 압박했다.

여기서 김무성은 당을 대표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으나, 공천관리위원회 심사장에 들어와 이한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심사를 받거나 당대표 권한인 비례대표 선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하나의 파문이었던, 친박계 윤상현 의원이 취중에 “김무성 그 새끼 죽여버려”라고 한 막말도 듣는다.

김무성은 ‘친박계’가 주도한 공천 학살에서 그나마 자기 세력 지키기에는 성공해서 대표적인 비박계 의원들이 잘려나가는 와중에 공천 학살에서 살아남았고,

 

자기 세력만 살아남은 공천 학살이 최종 완료 된 시점에, 친박계 인사들끼리 회식을 하는 등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였다.

한편 회식 전날, 친박계는 대표적인 유승민, 이재오 등을 공천 탈락 시키기에는 명분이 부족한데다 경선을 시키자니 ‘친박계’ 의원들보다 이미 지역구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유승민, 이재오를 이기지 못할테니 이들 지역구에 대한 공천을 하지 않고 미루고 있었다.

유승민 이재오는 20대 총선에 출마하려면 당에 남아 받지 못할 확률이 매우 높은 공천을 기다리거나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결국 탈당을 한다.

그래서 친박계 인사들은 탈당한 유승민 이재오 등의 지역구에 ‘친박계’를 공천한다는 계획 실현을 이루기 직전이었고, 이 회식을 하면서 ‘친박계’가 공천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회식 다음 날, 친박계는 원하던 계획을 실현하려는데, 김무성에게 뒤통수를 한대 강하게 맞는다.

김무성은 에디터회견을 열어 “유승민, 이재오 등 5개 선거구에 대한 공천 추천장에 서명을 하지 않을 것이며, 후보자 등록이 마무리되는 3월 25일까지 최고위를 열지 않겠다”고 선언.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영도구로 내려가는 반격을 가한다.

김무성의 반격으로 한대 후려맞은 ‘친박계’는 당대표 김무성만이 쓸 수 있는 직인이 필요한데, 김무성은 부산에 있으니.. ‘당대표가 해외 출장 등으로 직무를 할 수 없을때 원내대표가 대행하는’당헌에도 해당하는 상황이 아니라. 무조건 김무성의 직인이 필요했다.

 

이때 지역구인 부산에 내려간 김무성은 이렇게 에디터들을 몰고 다니며 보란듯이 거리를 활보하며 인생샷(?)을 찍고다녔다.

 

그날 밤 김무성을 만나기 위해 부산에 도착한 ‘친박계’ 원유철 원내대표는 김무성과 자갈치시장에서 ‘자갈치회동’을 했고, 서울 여의도 당사에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다음날 김무성은 친박계 최고위원들과 약 5시간에 걸친 기나 긴 협상 끝에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한 유승민, 이재오 지역구 그리고 송파구 을에는 공천을 하지 않고, 대구 동구 갑, 수성구 을, 달성군에는 공천을 하기로 한다.

 

여기서 이재만 전 동구청장은 공천, 무공천 대상자가 번복되자 최고위가 열리는 회의장에 들어가 당 최고위원들을 만나려고 했으나 진입을 거부당하며, 분노한다.

김무성은 결과적으로는 비박계면서 유승민계를 형성한 유승민과 친이계의 핵심인 이재오를 지켜내면서 친박계 정종섭, 추경호를 살려주는 두 마리 토끼 전략을 보였다.

 

하지만 20대 총선은 대반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새누리당은 참패를 당했고..

김무성 역시 자신의 지역구에서 더민주 후보에게 40%가 넘는 지지율을 허용하기도 했다.

이후 김무성은 총선 참패 등으로 당대표에서도 물러난다.

 

그리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 김무성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대통령이 헌법을 훼손하며 국정을 운영했다”며 탈당을 요구하며 탄핵을 주장하다가, 비박계를 추축으로 한 ‘비상시국위원회’를 꾸려 ‘박근혜 퇴진’을 당론으로 채택한다.

이렇게 ‘친박’과 ‘비박’의 갈등이 고조될때, 김무성, 유승민을 비롯한 35명의 새누리당 의원이 탈당을 하고 분당을 선언, 바른정당을 창당한다.

 

김무성은 바른정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남경필을 지지했지만, 유승민이 후보로 결정되자 선거대책위원장직을 수락하여 활동을 한다.

여기서 ‘보수단일화’를 한다며 바른정당 일부 의원들이 대거 탈당했는데, 이때 탈당파는 ‘김무성계’로 분류되는 의원들이라 ‘김무성도 탈당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새누리당은 대선을 앞두고 당명을 ‘자유한국당’으로 바꾼다.

하지만 김무성은 이 탈당파와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었고, 19대 대선에서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다.

 

여담으로 바른정당은 19대 대선에서 승리하리라는 예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박근혜 탄핵과 더불어 끝까지 박근혜를 편든 ‘자유한국당은’ 몰락할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고,’ 보수정당의 대안으로 ‘바른정당’이 뜨리라 예상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홍준표를 앞세운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은 바른정당의 유승민보다 점차 우세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김무성은 일본으로 출국했다가.

 

‘노룩패스’를 선보이며 논란이 됐고, 몇 달 후

 

바른정당 대표 이혜훈이 ‘금품 수수 의혹’으로 자진 사퇴를 했을 때, 바른정당에 다시 분열이 보인다.

이 사건과 더불어 자유한국당 대표인 홍준표가 ‘박근혜’ 출당을 승인하면서, 힘을 입은(?) 김무성을 중심으로 한 ‘복당파’가 바른정당을 탈당하고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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