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사회주의 정당에서 독재정권이 되어버린 사건


 						  
 								 

1956년 8월. 북한판 ‘장검의 밤’이라고 불리는 ‘8월 종파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조선로동당이 사회주의 정당에서 1인 독재정권의 추종세력으로 바뀌게 된 단초라고 볼 수 있다.

초기의 북한 정권도 김일성을 지도자로 하는 조선로동당 일당독재정권은 맞지만,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하고 많이 달랐다.

 

당시의 조선로동당은 출신 배경과 성향이 각기 다른 여러 좌익계 세력들이 ‘소련’의 강요로 합병해서 출발한 ‘정파연합정당’이었다.

사실상 이때의 정부 구성은 ‘연립정부’에 가까웠다.

이때 정파들은 ‘만주파’ ‘갑산파’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국내파)’였다.

김일성 등이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동릭운동, 무장빨치산 활동을 했던 그룹인 ‘만주파’

일제강점기 김일성이 지도했다는 ‘조국광복회’의 산하조직인 ‘갑산공작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그룹인 ‘갑산파’

중국 본토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했고, 중국 공산당과 밀접한 그룹인 ‘연안파’

소련 출신 그룹으로 주로 중앙아시아와 연해주에서 활동한 ‘소련파’

일제 패망 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해 엄청난 세력을 자랑했던 ‘남로당파(국내파)’

이들은 6.25 전쟁까지만 해도 서로 견제하며 각자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 파벌별로 노선적, 사상적 차이도 엄청났는데, 연안파는 모택동식 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고, 소련파는 소련식 스탈린주의를 지지하다가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 현실사회주의적 집단 지도체제를 지지한다.

전후 경제 재건 때도 만주파는 급속한 협동농장화를 주장하고 중공업을 중시했는데, 소련파와 연안파는 자영농 허용, 경공업/소비재 위주의 경제 건설을 주장한다.

이처럼 각 파벌별로 서로의 사상이 너무 달랐는데, 이러한 이유로 김일성을 비롯한 각 세력들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발생한 사건이 8월 종파사건이다.

 

당시 파벌별 힘의 크기는 군정시절 내세운 김일성의 파벌이 북한 정부의 수반이었고, 권력도 가장 강했었다. 다만 초기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권력은 그다지 확고하지 못했기에, 최고 지도자이긴 했지만 ‘연립정부’형태와 가까웠기에 각 파벌의 견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김일성에게 다행이었던 것이, 김일성 자신은 소련파가 아니었음에도 소련에서는 김일성을 최고지도자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소련파의 상당수는 구한말과 일제시기 초기 연해주로 건너갔다가 1930년대 중앙아시아로 끌고간 고려인들의 2세들도, 소련파 인사들은 국내 기반이 전혀 없었으며 조선말이 서투른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련의 후원하에 정권을 장악한 김일성은 남로당계의 지지를 얻어 한국전쟁까지 일으킨다.

 

개전 초기 북한은 승승장구하면서 승전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지만,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뒤집혀졌다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간신히 패전위기에 벗어난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김일성 정권은 전쟁 실패에 대한 책임추궁으로 권력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문에 실패의 책임을 씌우기 위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한다.

여기에 대상으로 떠오른게 ‘남로당파’였는데,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 중국인민지원군과 밀접한 ‘연안파’와 소련군정과 밀접한 ‘소련파’를 공격하기는 힘든 일이며, 갑산파는 김일성과 연계 된 조직이었다.

여기서 남로당계의 지도자였던 박헌영이 숙청됐는데, 당시 박헌영의 경우 해당 시기 김일성을 아득히 능가하는 개인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 점에서 김일성에겐 박헌영이 눈엣가시로 생각했고, 또 실질적인 북한의 1인자가 되기 위해선 꼭 없애야 하는 적이었기에 김일성에겐 시기 적절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전쟁 중에도 은밀히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했는데, 연안파의 거두 무정 또한 낙동강 전선에서의 패배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중공군이 참전하기 직전에 숙청을 해버리는 치밀함도 보였다.

김일성이 무정을 밀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블랙 코미디였는데, 무정은 김일성이 지시한 평양 방어가 무리라고 주장했음에도, 김일성은 억지로 떠맡겼고 함락당하자 책임을 물어 숙청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이런 식으로 전쟁 중에도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을 숙청했고,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는 미제침략자들에 맞서서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이라고 포장하면서 권력을 계속 강화해 나간다. 

하지막 아직까지도 김일성에게 연안파와 소련파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의 김일성의 가장 강력한 정적이었다.

연안파와 소련파는 각각 중국과 소련의 후원 아래 김일성을 견제했는데, 김일성도 그들에게 그리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연안파, 소련파 내부에서는 김일성의 카리스마나 권모술수, 조직장악력을 보고 조직을 배신하고 김일성의 편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리고 1956년 4월. 김일성과 반대파들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등장하면서 스탈린 개인 숭배를 비판하고 신격화를 중지시켰는데, 연안파와 소련파는 이에 힘입어 ‘김일성 실각’이라는 목표로 연합한다.

그러나 이러한 김일성 실각 움직임은 김일성의 심복들에게 포착됐고, 김일성은 소련대사관에 “소련은 더 이상 반대파 인사들과 접촉하지 말 것”이라고 권고하며 반대파의 움직임에 대비한다.

그리고 김일성 반대파의 공개적인 도전은 1956년 8월 30일 열린 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에서 시작한다.

먼저 발언한 김일성 지지파들은 반대파인 서휘와 윤공흠이 책임자로 있던 직업동맹과 상업성에대해 비판에 나선다. 이후 발언에 나선 윤공흠은 ‘개인 숭배를 비판해야 하는 핵심을 벗어나 김일성의 간부정책 비판’으로 방향을 벗어난 발언을 한다.

이는 김일성 지지자들을 자극하는 말이었고, 윤공흠은 이들에 의해 억지로 단상에서 끌려내려오게 된다.

회의장의 살벌한 분위기를 감지한 윤공흠과 서휘 등은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해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신의주로 향한다. 이들의 탈출은 곧 권력투쟁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었다.

훗날 중국으로 망명한 서휘는 “윤공흠이 김일성의 간부들, 특히 당 간부들의 신망이 높았던 최용건을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은 비정치적 과오”였다고 회고했다.

 

8월 종파사건은 이렇게. 김일성의 한국전쟁 때 조금씩 숙청했던 물밑작업. 그리고 빨치산 시절부터 김일성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경험으로 김일성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 전원회의의 결과는 즉시 중국과 소련에 알려졌는데, 중국은 마오쩌둥의 오른팔이면서 김일성과 무척 사이가 좋지 않았던, ‘펑더화이’를 단장으로 하는 무시무시한 연합 대표단을 파견해 8월 전원회의의 조치를 철회하고 관련자들들 복권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김일성은 자신에게 과오가 없었고, 자신이 취한 조치가 정당했음을 내세우지만 연합 대표단의 강력한 포스로 결국 굴복, 조치를 철회하는 굴욕을 겪는다.

그러나 실질적 복권 절차를 차일피일 미뤘는데, 윤공흠과 서휘 또한 김일성의 박해가 두려워 귀국을 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김일성은 역으로 소련과 중국의 요구대로 자신에게 반대하는 반대파를 회유하는 한편 반대파의 완전한 제거를 위하여 ‘반종파투쟁’을 강도 높게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200여 명의 반대파 인사들이 ‘종파주의자’로 체포된다.

 

이후 1958년 소련과 중국이 준적대관계로 돌아서게 된 ‘중소결렬’이 일어나고, 김일성은 이에 더더욱 힘입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원시적 형태의 주체사상이 처음 등장한다. 중국과 소련 외세의 영향력을 거부하고 주체적 태도를 견지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등장했지만, 실상은 이상한 방향으로 사상을 짜맞추기 시작해서 결국 김일성 개인 숭배와 세습을 정당화한다.

김일성이 확실하게 권력을 잡자 숙청을 피하려 중국으로 도망친 사람의 수만 1천여 명에 달했는데, 종파 싸움을 할때 자신이 편이었던 갑산파도 자신의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덧붙여 북한의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는 이 사건 이후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막대한 수의 종파주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만일 8월 종파 사건에서 김일성이 실각했다면. 지금 북한은 어떻게 됐을까?

지금 북한은 주체사상과 결합되어 3대 독재까지 이어지는 막장 독재정치를 하고 있는데, 8월 종파사건이 일어나기 직전만 해도 북한은 아주 작고 제한적이지만 민주적인 시스템도 있었다.

예를 들면 어느 정도 조직간 비판도 자유로웠고, 소련 등에서 들여온 해외 문화 유입도 있었고, 해외에 나가는 것도 자유로웠기에.. 이런 구조로 쭉 이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018. 06 저작권자(c) 지식의 정석 / 사진 – 위키백과,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