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인데 ‘비리’를 저지른 한국전쟁 당시 막장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더불어 한국전쟁 시기의 최대의 흑역사 중 하나이자, 군수비리 대형참사.

1950년, 국군과 UN군은 중공군의 무단 월경과 전쟁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후퇴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는데, 이승만 정권의 요인들은 한동안 북한 치하에 있었던 남한의 장정들,

즉 곧바로 군인으로 징병할 수 있는 인적자원들이 다시금 공산군에 의해 징병될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했었다.

이미 북한 점령지역의 남한 청년들 다수가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강제징병되어, 조선인민군 에 징집되버린 전례도 있었다.

이때문에 한국 정부는 같은해 12월 15일,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한 뒤,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통과시킨다.

 

이 법안은 수십만의 장정을 동원하는 법안이었지만, 국회에서 통과될때는 예산계획을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통과될 정도로 매우 허술했다.

 

이런 상황에서 법안 통과 6일 후인 12월 21일 첫 부대 1만여 명이 창덕궁에서 소집돼 행군에 나섰는데,

(당시 중공군의 진격이 너무 빨라 서두른 것은 이해가 되지만, 행정체계 등이 제대로 갖춰지기 전에 1만여 명이라는 대규모 인원 이송을 기획하는 것 자체가 재앙을 예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작전처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쌀, 군복 등을 주지 않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명도 없이 ‘착지 부산 구포’라는 작전명만을 하달받았다고 한다.

 

식량의 경우엔 행군 대열 책임자가 경유지의 시장, 군수에게 육군본부로 부터 하달받은 ‘양곡권’을 보여주고 급식을 해결하라고 했는데, 당시 국방부와 내무부가 서로 양곡권을 갖겠다고 다투느라 이들의 식량은 제대로 해결될 리 없었다.

당시 북한에 의해 의용군으로 강제징집되었다가 탈출, 그리고 국민방위군에 들어간 ‘서태원’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군 치하)의용군 시절에는 주먹밥이나마 하루 세 끼를 거른 적이 없었는데, 국민방위군으로 남하할 때는 병자나 아사자가 속출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

고 회고하고 있다.

 

게다가 때가 12월이고, 당시 유례없는 혹한이 찾아왔는데, 소집된 장정들은 ‘정부가 군인으로 소집했으니, 알아서 먹여주고 입혀주지 않겠나’하는 생각으로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에 길을 나섰다고 한다. (법안 통과로 국가가 징집한 정식 병력자원이라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 없이 허술하게 통과 된 법안이기에, 이들을 위한 옷값 또한 배정이 되지 않았었다. (그 이유가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은 배정해서 무엇하냐는 것이었다.)

 

따라서 장정들은 2명당 1장씩 지급된 ‘가마니’로 서로의 체온을 의지해 추위를 견뎌야 했으며, 교실 같은 곳에서 잘땐 수백명이 수용돼 서로의 몸을 맞대고 자야 했다.

이렇게 열악한 지원 + 혹한 = 면역력이 급격히 저하, 질병이 창궐하며 사망자가 발생하는 ‘죽음의 행군’이었다..

 

문제는 이 행군이 끝난 것으로 국민방위군의 고난이 모두 끝난 것이 아니었는데..

법안에 따르면 50만 병력임을 가정한 국민방위군을 후방 50여개의 육군 교육대를 설치해 1개 교육대 당 1만여명을 수용할 것이 명시되어있었다.

하지만 실제 교육대에선 국민방위군를 받아들일 능력도 없었고, 의지도 없었다.

게다가 이들을 실질적으로 담당했던 간부들은 이승만 정부 산하의 백색테러 단체였던, 서북청년회 소속이 합류한,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이들은 정규군으로서 훈련이나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고, 사령관인 김윤근은 준장이라는 계급을 달고 있었지만 계급만 준장이지 정규군 장교가 가져야 할 군사적 자질도 전혀 없었다.

비전시도 아니고 전시상황에서 군인으로서 자질도 없는 자들을 군 간부로 충원한 것이다.

(물론 창군 2년만에 벌어진 전쟁이지만, 상이군인도 존재했는데 그들을 활용할 생각을 안했다)

 

이런 상황이기에 국민방위군은 한 교육대에 도착했어도, 수용능력이 없어 다른 교육대를 알아보라는 식으로 계속 뺑뺑이를 돌게 된다.

하지만 군인의 사명감 없이 자기보전과 부의 축적부터가 우선인 민간단체 군 간부는 이 상황에서 서류를 날조해 예산을 빼돌리기도 했다.

 

국민방위군 재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부사령관 윤익헌은 (당시 육군 대령)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기생들에게 돈을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 감찰위원회(지금의 감사원)의 1년 예산이 3천만원 가량이 될때, 윤익헌은 100여일 동안에 기밀비 명목으로 무려 3억원을 사용..

뒤늦게 국민방위군에 할당된 예산에 따라 식량이 지급된다 하더라도, 장정들은 하루 4홉을 배급받게 돼 있었는데, 하루 5홉 5작을 받는 전쟁포로만도 못한 배급이었다.

이런 식으로 식량 예산을 사용해도 빠듯한 상황에서 국민방위군 사령부는 ‘젤리(엿)공장’을 짓는 다고 발표하는데, 당연히 이는 예산 횡령을 위한 한 방편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보면

‘생산능력에 비해 소비한 것으로 기록된 쌀의 양이 6배가 넘었고, 자동차를 250대 구입했다더니 20대 밖에 구입을 안했고, 생선을 산다더니 장부상 기록의 1% 정도만 구입한 등 예산 횡령 목록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당시 국회에서도 여당 노릇을 하던 신정동지회에도 이 횡령된 금액 중 상당액이 유입되었다고 한다.

 

이승만 정부의 공식기록을 보면 1,000~2,000명이 사망으로 되어있지만, 당시 소문으로는 5만~ 10만명이 죽었다고 하며, 중앙일보가 간행한 <민족의 증언>에는 총 50만 명의 대원 중 20%가 병사 혹은 아사했다고 되어있고, 부산일보가 간행한 <임시수도 천일>에는 사망자가 50,000명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구체적인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 측정하는게 불가능항 상황이다. 상당수의 사망자가 행려병자로 처리됐고, 약 100일 동안 각종 질병, 동상, 아사, 도주 등으로 전체의 40%에 해당되는 약 27만 명이 사라졌기에…)

 

전시 상황이었음에도 이렇게 충격적인 비리행태는, 국민방위군 참상이 곳곳에서 목격되면서 사회문제가 되자 사건 수사가 시작, 관련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초기엔 이들에게 선고된 형량이 너무 낮아 비판여론이 격앙되자, 이승만은 당시 국방장관인 신성모를 경질하고, 육군참모총장을 정일권에서 이종찬으로 교체했다.

하지만 1951년 7월 15일 군민방위군 재판장에서 정일권(당시 육군총장)에게 “국민방위군 사령관은 일등병의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별을 달고 사령관이 될 수 있는가”하고 묻자.

정일권은 “이승만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재판의 결과는 새로 임명된 이종찬 육군총장이 관련된 주요 간부 5명에게 사형을 선고, 이들은 대구 근교 야산에서 공개처형된다.

(하지만 앞서 말한 윤익헌 등이 엄청난 액수를 횡령하면서, ‘더 높은 쪽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이들이 사형당했기에 얼마나 누구에게, 어떤 용도로 흘러들어갔는지는 미지수다)

 

한국전쟁 기간에 우리쪽 군인들이 후방에서 추위에 굶주리다 처참하게 죽은 ‘국민방위군 사건’

당시 육군 통역장교였던 리영희 소령은 “6.25전쟁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생행위”라고 회고하고 있다.

덧붙여 이 사건은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더불어 한국전쟁에서 있었던 최악의 흑역사인데,

쉽게말하자면 일본군이나 독일군 미군 또는 소련군들이 포로에게 했던 짓거리를 전시 중 자국의 예비병력 대상으로 저지른 꼴이다.

예를 들자면 독일군이 독소전쟁에서 사로잡은 소련군 포로들을 식량도 지급하지 않고, 혹한에 수백킬로를 걷게 하여 사망케 한 일이있다.

한편 2002년 경북 영천에는 국민방위군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2018. 06 저작권자(c) 지식의 정석 (무단 사용-재배포 금지) / 사진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