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라면 박스 함부로 버렸다가 생긴 일

  						  
 								 

앞으로 경상북도 경주에서는 쓰레기 버릴 때도 세세히 살펴봐야한다.

이런 이유와 관련해 과거 유명한 일화가 다시 한번 화제를 모으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저기 저 박스는 뭡니까?”(안승준 연구원)

“아! 저거요. 종이부스러기인데요. 아마도 중국책 같아요.”(손성훈 씨)

“어떤 내용인데요?”(안 연구원)

“몰라요. 우리 아버지가 남 보기 부끄럽다고 내버리려고 치운 것으로 보이는데요. 좀 있다가 버릴 거예요.”(손 씨)

“아니, 무언지는 모르지만, 저희가 가져가서 정 쓸모없는 것이라면 제가 버릴게요.”(안 연구원)

“그러세요.” (손 씨)

라면 상자에 담겨 있던 종이부스러기는 몽골 최후의 법전인 지정조격(至正條格)이었다.

2003년 경주 양동마을 경주손씨(慶州孫氏) 종가 고문서 뭉치에서 발견된 지정조격은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원대(元代) 법전이다. 지정조격은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6년, 고려 충목왕(忠穆王) 2년인 서기 1346년에 완성됐다.

중국에서도 사라진 지정조격이 국내에서 발견되자 국내는 물론 전 세계 학계가 흥분했다. 2010년 3월에는 남바린 엥흐바야르 전 몽골 대통령을 비롯한 몽골 방문단이 이 세기적 발견품을 직접 보려고 한국을 찾기도 했다.

하마터면 쓰레기 더미에 버려질 뻔한 지정조격을 발굴한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장서각 책임연구원은 “그 헌 라면 박스에 지정조격이 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조사한 뒤에도 몇 달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고 말했다.

경주손씨 종가 종손 손동만 씨는 1994년 집안의 책자와 문서를 정리하면서 너덜너덜한 대나무 종이(竹紙)로 된 중국책을 쓸모없는 물건이라 생각해 라면 상자에 넣어 고방(庫房.창고) 한편에 뒀다. 나중에 내다 버릴 생각이었다.

손동만 씨가 1996년 세상을 떠나자 아들 손성훈 씨가 대를 이어 집안의 문헌을 관리하게 됐다. 종가 건물이 보물로 지정돼 문화재청 주관으로 건물을 수리하게 됐는데 그 과정에서 도난사고가 발생했다. 손성훈 씨는 모든 전적을 한중연 장서각에 기탁하기로 했고 이 과정에서 부친이 라면 상자에 담은 지정조격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안 연구원은 “지정조격이 거의 원형으로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초기 사용된 이후 이 책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라면서 “미라 상태에서 600년을 버텨온 것”이라고 놀라워했다.

지정조격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려 때는 형사법(獄訟)의 근간이 됐고 조선조 세종 연간에는 중국 제도를 연구하는 중요 자료로 활용됐으며 역관 시험(譯科)의 주요 과목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안 연구원은 “지정조격은 중국에도 전하지 않은 유일본(唯一本)”이라면서 “원의 법률서이지만 몽골의 고려 침입 이후 100년 이상 영향을 지대하게 미친 법전으로서 우리 한국의 역사와 제도, 어학을 연구하는 중요 자료“라고 평가했다.

yunzhe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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