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마피아와의 전쟁 : 막시프로체소

2017년 6월 12일   admin_pok 에디터

영화 대부 The Godfather (1972)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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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발 이게 뭐야?

– 시칠리안 방식의 메시지야

루카 브라시가 물고기들과 함께 잠들었대.

(마피아는 피해자의 친구들에게 생선을 보냄으로서 너네 친구가 수장됐어! 라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1980년대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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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는 암묵적으로는 다들 인정했지만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은 범죄조직이었다.

어느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이미 국가의 삼법 (입법, 행정, 사법) 시스템 내 침투되어 있는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오히려 ‘피오 라 토레’ 같이 마피아를 규탄한 정치인들은 손쉽게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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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섬 팔레르모의 산 도메니코성당. 안타깝게도 시칠리아는 섬의 아름다움보다 범죄로 유명하다.

마피아 전쟁

1978년 시작되어 1980년대 중반까지 시칠리아 마피아들은 섬과 국가의 주도권을 위해 전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마피아 조직원들은 물론이고 정부 고위 관료, 군 장성, 및 수천의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Palermo, 1975. Dopo i colpi del killer restÚ seduto sulla sedia, senza cadere

1975년 시칠리아 한 거리에 버려진 시체. 당시 시칠리아의 치안을 말해준다.

마피아로 인해 애꿎은 피해를 입은 이탈리아 시민들은 이에 대한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안티-마피아

시칠리아의 행정수도 팔레르모의 판/검사들이 힘을 모아 마피아의 정체를 법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뭉쳤다.

워낙 마피아 네트워크가 이탈리아 전체에 퍼져 있기 때문에 모임 내 누군가가 모임을 배신하거나 기밀을 누설할 시 배신자를 소추하겠다는 각서 역시 작성했다.

동료들이 죽어나갔지만 지오반니 팔코네파올로 보르셀리노는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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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지오반니 팔코네, 오른쪽 : 파올로 보르셀리노. 정의감으로 불타는 두 검사는 시민들 사이에서 큰 지지를 얻었다.

그들은 마피아 변절자들을 섭외하는 데 성공하며 마침내 1986년 2월 10일 마피아 조직을 법정에 세우는 데 성공했다.

토마소 부셰타 – 용감한 변절자

 

 

 

4.1.1

특히 토마소 부셰타는 마피아 전쟁의 승리자인 꼴레오네 (Corleone) 가문에 의해 그의 두 아들과  친척들이 암살당하자 유일한복수의 수단으로 검사 지오반니 팔코네에게 마피아에 대한 정보를 넘기게 된다.

부셰타가 이 때 넘긴 자료는 이 때까지 얼마나 세상이 마피아 / 코자 노스트라 조직에 대해 무지했는지를 알려주었다.

 

부셰타의 도움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마피아가 ‘개인’이 아닌 ‘조직’ 으로서 기소되었다고 한다.

재판의 날. Maxiprocesso 막시프로체소

1986년 2월 10일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재판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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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은 팔레르모 법정의 대형 벙커에서 이루어졌다. 로켓 공격을 견뎌낼 수 있는 강화 콘크리트 벽이 일품인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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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많은 피고인 수와 그들의 ‘마피아’ 성향을 고려해서 그들을 가두어 놓을 철창 역시 특별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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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마피아의 공격에 대비해 총기병대 까라비니에리 (carabinieri)가 기관총을 들고 하늘과 땅을 24시간 주시했다.

피고 475명 (중 119명은 수배중 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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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을 도맡았던 일반 조직원부터 보스급까지 모조리 잡혀와 법의 심판을 받았다.

판결이 끝나기 전에 판사의 신변에 이상이 있을수도 있다며 ‘대체’ 판사 두명이 항상 담당판사 옆에서 대기했다.

마피아들은 법정에서도 범죄자 기질을 뽐냈다.

한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며 자신의 입을 직접 스테이플러 (호치케스)로 찍어서 의지를 확고히 했고, 다른 몇몇은 미친 척을 하거나 싸움을 걸었고, 일부는 만약 자신들이 유죄라는 판결이 나면 그 자리에서 자살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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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12월 16일. 1년 10개월 후

판결을 읽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360명 유죄

총합 2665년의 형량 (종신형을 받은 보스급 제외)

재판에 결석했던 수배중이던 피고들 중 몇몇은 재판 도중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114명 무죄 (증거 불충분)

무죄 중 18명은 마피아 동료들에게 암살당했다.

(이 중 안토니니오 치울라는 풀려나 집에서 파티를 하러 가는 도중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암살당했다).

이탈리아식 정의

마피아를 처음으로 조직으로 규정할 수 있었기에 재판은 성공적으로 보였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이후 반론으로 인해 수감되어야 할 60명만이 제대로 수감되었고, 나머지는 무죄로 풀려났다.

게다가 그들은 마피아 빽과 영향력을 이용하여 병에 걸린 것처럼 위장하고 병원에서 꿀을 빨았다.

시간이 지나자 마피아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와 증오는 다시 두려움과 무관심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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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라도 까르나발레 같은 친마피아 판사들은 예전처럼 마피아의 뒤를 봐주기 시작했다.

희생

풀려난 범죄자들은 강적 팔코네와 보르셀리노에게 복수함으로서 마피아의 건재를 과시하고자 했다.

먼저 팔코네를 잡기 위해 마피아들은 그가 지나갈 고속도로에 0.5톤 상당의 폭탄을 숨겼다.

1992년 5월 23일 팔코네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를 경호하던 세 명의 경찰관이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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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들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 폭탄의 위력, 차량 속도와 폭발 타이밍을 실험하기도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수천의 인파가 그의 장례식에 참여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공중파 TV는 그의 장례식을 중계하고 나서 모든 프로그램 송출을 중단하였다.

Giovanni Falcone's funeral. Funerali di Giovanni Falcone.

그의 장례식은 앞서 언급된 팔레르모의 산 도미니코 성당에서 치뤄졌다.

보르셀리노는 절친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불과 57일 후, 

모친의 아파트 근처에서 보르셀리노가 타고 있던 차와 경호차가 폭발했다.

보르셀리노는 물론이고 그를 경호하던 5명의 경찰관 역시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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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코네의 죽음 이후 보르셀리노의 경호 강화를 위해 보르셀리노가 가는 길마다 미확인 차량의 주정차를 금지시키는 것이 경찰의 원칙이었으나, 그날만큼은 경찰이 그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다음날 팔레르모 시청은 시위대로 둘러싸였다. 그의 장례식은 팔코네의 장례식보다 더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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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셀리노의 장례식. 시민들은 범죄 당일 주위를 제대로 수색하지 않은 경찰서장을 찾았고, 그는 뭇매를 맞고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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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사도로 인식되던 팔코네와 보르셀리노의 죽음은 무관심한 이탈리아를 잠시나마 다시 일깨웠다.

마피아 관련 재판은 계속되었고, 1992년, 1993년과 1995년에는 첫 재판에 비해 비교적 많은 비율의 마피아 조직원들이 유죄를 선고받고 형량을 부여받았다.

에필로그

보르셀리노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5월 21일) 그는 마피아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같은 사업가들의 관계를 조사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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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 조사 내용을 담은 것으로 알려진 보르셀리노의 ‘붉은 노트’는 폭발 현장에서 사라졌고, 이후 아무도 그 노트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사업가이며 언론/방송국의 거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9년간 이탈리아의 총리가 되었다.

각종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력은 아직도 막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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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AC밀란의 명예 회장이자 한 정당의 대표이기도 하다.

팔코네, 보르셀리노 같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탈리아는 친 마피아, 친 파시즘의 적폐세력이 사회 상류층을 구성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선량한 이들의 수수방관은 악이 승리하는데 유일한 조건이다”

에드문드 버크

 

출처 – //www.fmkorea.com/626967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