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서는 역대 조선 임금의 모습이 공개되었다.
태조
자신의 여진족 사병을 이끌고 전쟁터를 누볐던 무인답게 무인의 기백이 느껴진다.
이 초상화는 전라도의 경기전에 있던 것.
태조의 젊은 모습
고향인 함경도의 준원전에 있던 어진을 사진으로 찍은 것.
일제시대 일본순사가 순찰돌다가 영엄함을 느꼈는지 사진으로 남겼고 지금까지 남아있다.
운좋게 남은 이 사진을 보고 수차레 복원을 했지만 사진처럼 흡사한 디테일을 살리지 못했다.
세조
원래는 전부다 태워먹었는데 화가 김은호가 일제시대에 진본에 대고 배껴 그린 초본을 고궁박물관에서 낙찰받으면서 복원이 가능해졌다.
말 그대로 기적적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그림은 포토샵 추정 복원도.
정원 대원군
죽고 나서 왕으로 추존되서 원종이라는 호가 붙었다.
선조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동생이고 인조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기록에는 행동이 방탕하고 성질이 나빠서 손가락질을 받았다한다.
영조
그림은 영조 51세 때의 모습.
아들 사도세자를 대차게 괴롭히기 시작할 무렵으로 보인다.
눈매가 날카로운 것이 예민한 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20대 초반의 영조
최무수리 아들 연잉군 시절의 모습.
특유의 매부리코가 인상적이다.
철종
일명 강화도령.
왕족 전용 유배지 강화도에서 평민이나 다름없이 살다가 허수아비로 왕이 된 인물.
짙은 쌍커풀이 눈에 띤다.
고종
이제 신식 문물이 들어온다.
왕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순종
명성황후의 아들인 순종.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
안타깝게도 지금까지의 사진과 그림이 조선 시대 왕의 실제 얼굴을 알 수 있는 전부다.
사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이것보다 왕의 어진은 더욱 많이 남아있었다.
표시는 현재 모습을 알 수 있는 왕.
위 표는 1930년대 어진을 수리하면서 남긴 목록표인데 지금보다 훨씬 많은 어진을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어진이라는 것은 원래 당시에는 왕과 동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의 왕실의 최고존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조선의 제일의 보물인 것이다.
그리고 남은 어진들은 아래와 같다.
순조
얼굴이 날라갔기 때문에 복원이 불가능하다.
사진을 구하는 시간이 불과 몇 초만 빨랐다면 원종처럼 복원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 어진은 희귀한 원유관 어진이라는 점에서 더욱 아쉬울 수 밖에 없다.
위와 같이 원유관에 강사포를 입은걸로 추정된다.
효명세자 익종
순조의 아들.
이것도 희귀한 면복을 입고 있는데 아쉽게도 이목구비만이 불에 타버렸다.
이와 같이 소중한 국보급 유물인 어진들 대부분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흔히 한국전쟁 때 어진을 날렸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전쟁 당시 창덕궁에 있던 왕실재산 4000점을 부산으로 옮겼는데 전쟁이 끝나고 1954년 12월, 1년 6개월이나 지난 시점에 부산에 큰 불이 나 손상된 몇백개의 유물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인들이 패전하고 물러갔지만 그 비어있는 행정의 구멍을 전혀 매꾸지 못해 발생한 참극이었다.
일본인 밑에 있던 관리자 한국인은 사장으로, 사원 한국인은 관리자가 되었지만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아주 기본적인 보존을 위한 사진 한장을 찍어놓지도 않았다.
선조들이 오랜 시간을 걸쳐 전해온 왕의 얼굴들, 현재를 사는 우리는 되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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