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 무료 독감백신이 협상 테이블에 등장하며 한국도 미국처럼 ‘백신 정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11월 3일 대선을 앞두고 ‘백신 정치’가 한창이다. 공화당 트럼프 대통령은 백신 개발을 앞세워 대선에서 역전을 노리고 있다. 반면 민주당의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트럼프가 백신 개발 일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비난했다.
독감 백신 주무부처는 질병관리청이다. 질병청은 전국민 무료 접종이 불가능하고, 확대에도 난색을 보인다.
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 본부장은 9일 정례브리핑에서 “올해 독감 백신 생산물량은 2950만 병 정도로, 전 국민이 다 맞을 수 있는 양은 아니다”며 “접종 우선순위에 있는 분들이 먼저 맞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권준욱 중앙방역대책본부(방대본) 부본부장은 15일 정례 브리핑에서 ‘독감 예방접종을 전 국민으로 확대하자는 의견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질의에 “독감 관련해서는 50% 이상의 접종으로 유행을 관리하는 게 통상 세계 질병관리의 이론적인 배경”이라며 “우리나라는 이번 절기에 시중에 필수 예방접종과 민간이 확보하게 될 접종량을 합하면 전체 인구의 약 57%에 해당하는 물량이 확보돼 있다”고 밝혔다.
권 부본부장은 “이는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수준”이라며 “영국도 전체 국민의 75%에 대한 접종 목표를 세웠지만 현재 확보한 물량은 50%선”이라고 말했다.
또 “일본의 경우 전체 인구의 50%가 확보돼 있고, 이미 인플루엔자 유행이 지난 남반구의 호주나 뉴질랜드 같은 나라는 50%가 안 된다”며 “미국의 경우 우리와 비슷한 정도”라고 덧붙였다.
독감 백신 접종은 8일 이미 시작됐다. 생후 6개월~만 18세 청소년, 임신부 및 62세 이상 등 고위험군 1900만명이 무료 접종 대상이다. 국민의 37%이다.
무료 대상은 지난해 1381만명에서 1900만명으로 519만명 늘었다. 올해 독감 백신 총 공급분은 2950만명(국민의 57%)이다. 1000만명은 유료로 보건소나 민간의료기관에서 맞으면 된다.
전국민이 백신 접종을 하려면 2000만 명분 이상의 물량을 추가로 확보해야 한다. 국내에서 생산을 하던지 수입을 하던지 해야 한다.
하지만 국내 생산은 이미 끝났다. 국내 생산회사는 녹십자·일양약품·보령제약·동아제약·SK바이오사이언스 등이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세포배양으로 생산하고, 나머지는 유정란에 균주를 이식해 생산한다.
유정란 방식은 병아리를 프랑스에서 봄에 수입해 이들이 낳은 유정란을 활용해 백신을 만든다.
그러나 8월에 이미 국내용은 생산이 끝났다. 병아리를 지금 수입해서 백신을 추가 생산할 수도 없다.
지금부터 병아리가 낳은 유정란으로 해외 수출용 백신을 생산한다. 이것을 국내용으로 돌릴 수 있는 길은 없다.
녹십자 관계자는 “앞으로 생산하는 물량은 세계보건기구나 남반구 국가들과 이미 계약이 끝나 국내용으로 돌릴 길이 없다”고 말한다.
SK바이오사이언스 관계자도 “이달 초 생산이 완료됐다. 추가로 생산하려면 3~4개월 걸리는데, 그게 불가능하다. 코로나19 백신 위탁 생산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노피·GSK 등 외국 제약사에서 추가로 수입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면 무료 접종분을 제외한 1050만명분을 무료화하는 길이 있을 수 있다. 여야는 이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질병청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질병청 관계자는 “1050만명분을 무료 접종할 경우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하겠느냐. 이런 절차를 마련하는 데 시간이 걸려 접종의 적기를 놓칠 수 있다”고 말했다.
저소득층 위주로 맞힐 경우 소득·재산 조사에 골머리를 앓아야 한다. 소득보다는 건강 위험도가 접종 우선순위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따지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일선 제주·부산남구 등 일선 지자체도 주민 무료 접종을 속속 발표하고 있다. 이 역시 방역 당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질병청 관계자는 “일선 지자체에 무료 접종 대상에 드는 권장 대상자 위주로 접종하라고 권고 공문을 보냈지만 단체장이 정치적으로 활용한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무료 접종 대상을 넓히면 만성질환을 앓는 사람이 접종할 길이 막힐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가령 50대 만성질환자가 무료접종 확대에 막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올해 독감백신은 코로나19와 뒤섞이면서 한 차례 홍역을 치렀고, 정치권에서는 ‘무료’라는 카드를 들고나오며 정치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자칫 ’11월 접종 완료’라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도 못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는 상태다.
콘텐츠 저작권자 ⓒ지식의 정석 (무단복제 및 재배포 금지)/사진 = 뉴스1, 게티이미지뱅크,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