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최강의 장수 중 하나인 ‘수부타이’

2017년 June 19일   admin_pok 에디터

“펠트천이 바람으로부터 칸을 보호하듯
제가 칸의 모든 적을 막겠나이다.”

 

오늘은 전쟁사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가히 역사상 최고로 꼽히는 장군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
극동의 유가문화권과 유럽 기독교 세계, 중동의 이슬람 세계까지
거의 전 세계를 휩쓴 몽골제국 최고의,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장.

소개하겠습니다.

 

수부타이(Subutai, Сүбээдэй)

 

-몽골친구들한테 물어보니 발음을 “수베테” 라고 하던데, 일단 여기선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수부타이” 로 쓰겠습니다.

그리고 이번편은 무지막지한 스압이 예상되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서기 1206년. 세계 역사에 남을 일대사건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부족이 할거하던 아시아 북부초원지대가 단 한명의 지배자의 명을 받는 나라로 통일된 것이죠.

너비가 거의 3백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광활한 초원지대는 수많은 유목민 부족들이 난립하여 불화와 전쟁이 끊이지 않았었는데 한 위대한 정복자에 의해 통일되어 마침내 전쟁은 끝나고 “몽골” 이라는 국가가 출범하게 됩니다.

이로써 초원에는 평화가, 다른 기타 모든 문명국들에게는 재앙이 시작됩니다.

 

-몽골 침략 이전 세계-

 

1. 탄생. 대재앙의 잉태

서기 1176년. 현재 러시아 동남부와 몽골 동북부를 가로질러 흐르는 오논강 상류유역에서 한 남자가 태어납니다.

이후 위대한 초원의 지배자, 칭기즈칸이라 불리게 되는 테무진을 섬기던 우랑카이 부족의 일원인 카반의 아들로 태어난 이 남자는 수부타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됩니다.

먼저 이름을 떨치게 된 건 수부타이의 형인 젤메였습니다. 수부타이보다 15살 위인 젤메는 테무진이 초원을 통일하는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칭기즈칸이 가장 신임하는 4선봉중 일인으로서 초원에선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장군이었습니다.

당연히 수부타이도 형인 젤메를 따라 테무진을 섬겼으며 성인이 되자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하여 뛰어난 전략적 감을 발휘하여 여러차례 공을 세웁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는 말을 입증하듯, 칭기즈칸은 초원을 통일한 직후, 이제 갓 서른이 된 수부타이의 뛰어난 전략적 안목을 꿰뚫어 보았고 자신의 4선봉중 일인인 제베의 부관으로 임명하여 본격적으로 수천명 이상의 병력을 지휘하는 경험을 쌓도록 하게 합니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이 선택은, 결국 몽골제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 그 외 모든 나라에게는 대재앙인 무적의장군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2. 총력전. 초원vs이슬람

서기 1219년. 한창 여진족(쥬르첸)의 제국 금(진)에 대한 침략에 골몰하고 있던 칭기즈칸에게 서쪽으로부터 느닷없는 비보가 날아듭니다.

당시 몽골은 이슬람 세계 최강대국인 호라즘(혹은콰레즘) 제국과 통상교역을 하고 있었는데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에서 건너간 상단 전체가 호라즘 국경에서 처형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상단에 첩자가 끼어있었다는게 그 이유인데 당시 호라즘 제국의 샤(황제) 무함마드는 첩자가 있다는 보고를 받자 자초지종을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처형명령을 내렸고 이를 항의하기 위해 온 몽골사절단의 수염을 밀어버리고 사절단장을 처형하는등 세계역사상 손꼽히는 희대의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몽골의 사절단을 모욕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슬람 세계의 샤에게 초원의 칸으로부터 짤막한 서신이 도착합니다.

“네가 전쟁을 선택했으니 너의 소원대로 해주겠다.”

이 서신을 받을때까지만 해도 무함마드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명실상부 중화문명과 함께 세계를 떠받치는 커다란 두 기둥 중 하나였습니다(그 당시 유럽은 너무 낙후되어 있었음). 이 이슬람 문명에 속한 나라들 중 최강대국은 호라즘 제국이었고 호라즘 제국의 샤는 즉,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무소불위 지고무상의 일인자였습니다.

무려 40만에 달하는 대병력과 수많은 전투코끼리와 낙타부대를 보유한 무함마드는 실제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주들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분노한 칭기즈칸이 동원한 10만 몽골 전 기병력과 주치,차가타이,톨루이,제베,젤메,수부타이,쿠빌라이,보르추 등 기라성 같은 지휘관들이 모두 참전한 몽골의 호라즘 정벌은 말 그대로 신의 징벌,초자연적인 재앙이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시종일관 일방적인 전개로 흘러가 끝이 났으며 강대했던 호라즘 제국은 몽골과의 전면전이 일어난지 불과 2년만에 지도상에서 영영 사라져 버립니다.

3. 전쟁의 신. 수부타이 신화의 시작

서기 1220년. 호라즘 대 몽골전쟁의 막바지, 칭기즈칸은 이미 처참히 박살나 모든 군대를 잃고 도주하던 무함마드를 추격하는 임무를 수부타이와 제베에게 일임했는데 거의 광대한 호라즘 제국의 전 영토를 한 바퀴 돌다시피한 무함마드의 도피행은 카스피해의 한 섬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끝이 났고 이 무함마드를 추격하던 수부타이는 그 와중 지나치던 모든 지역을 초토화시키거나 정복합니다.

칭기즈칸은 수부타이에게 2만군대의 지휘권을 주었는데 수부타이의 이 미쳐 날뛰는 2만군대는 이란,이라크,코카서스 지역을 모두 정복하고 그대로 북상하여 투르크를 박살내고 그루지야,쿠만족의 킵챠크까지 멸망시켜버리는 일반적인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전공을 세웁니다.

 

내친김에 러시아까지 진군한 수부타이는 당시 동유럽 최강국이자 러시아의 전신인 키예프 공국까지 침략하는데 이미 킵챠크인들로부터 무시무시한 야만족 군대가 진군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키예프 공국은 킵챠크,노브고로드와 연합하여 총병력 7만을 끌어모아 일대결전에 나섭니다. 이 7만대 2만의 싸움에서 연합군 7만은 한 명도 살아돌아가지 못하고 전원 몰살당하게 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수부타이는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아까지 진군하여 칼카강 전투에서 4만에 달하는 키예프군의 남은 전 병력을 또 다시 궤멸시킵니다.

칭기즈칸으로부터 소환명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이 파죽지세의 진군은 드디어 멈추게 되고 이미 병력을 모두 잃은 키예프 공국은 간신히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러시아인들은 악몽같았던 야만족의 침략에서 해방되는데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이 침략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4. 다시 동쪽으로

호라즘 제국과의 전쟁은 몽골로서도 총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는 대전쟁이었고 몽골 또한 이 전쟁에서 상당한 손실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 틈을 타 이미 몽골에게 짓밞혔던 탕구트족의 서하가 다시 일어났고 금제국도 다시 재기하는 중이었죠.

칭기즈칸은 다시 수부타이 등 장군들을 불러모아 서하를 멸망시키고 여기서 숨을 거둡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땅을 정복한 정복자.칭기즈칸-

인류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정복하고 가장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정복자가 죽었지만 몽골제국의 기세는 여전히 그칠줄을 몰랐습니다.

칭기즈칸 사후 쿠릴타이에서 칭기즈칸의 삼남인 오고타이(몽골어로는 “오고데” 라고 발음하더군요)가 칸으로 선출되고 다시 전쟁이 재개됩니다.

 

결국 몇차례 결정적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수부타이의 군대에 의해 금의 수도가 함락되고 마지막 황제 애종이 도피 중 자살하면서 한때 동아시아 최강 군사력을 자랑하던 여진족의 금제국 또한 이렇게 역사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됩니다.

5. 또 다시 서쪽으로

 

1236년 이전까지 수부타이와 몽골군의 진군로

몽골제국은 이미 이슬람 세계 최강국인 호라즘과 동아시아 최강국인 금을 정복하여 이전까지 존재한 적 없었던 세계 최대의 제국이 되었지만 여전히 정복의 야욕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금제국을 멸망시킨 후 열린 쿠릴타이에서 수부타이는 이전 러시아 침략 때 보아둔 수많은 은광,암염광,드넓은 흑토지역을 거론하며 몽골제국 서부의 안전보장을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유럽을 침공할 것을 주장합니다.

 

당초 오고타이 칸은 유럽정벌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었습니다. 아버지인 칭기즈칸이 죽기전 남송을 정복하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을 뿐더러 유럽은 굳건한 성채들과 막강한 군사력에 비해 문명수준은 워낙 보잘것 없었기 때문에 들이는 힘에 비해 얻을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죠.

상식적으로도 약탈할 보물들이 넘쳐나고 이미 약탈로 쏠쏠한 재미를 봤던 이슬람 문명권이나 중화 문명권을 더 정복하는 것이 구미가 당길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제국 최고의 장군인 수부타이의 서쪽끝까지 나아가 온 세계를 정복한다는 이 웅대함은 몽골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오고타이도 결국 이 웅대한 비전에 마음이 움직여 유럽원정을 승인하고 칭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인 왕자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삼고 수부타이에게 바투를 보좌하게 하여 유럽원정군을 출정시킵니다.

바투도 칭기즈칸의 피를 이어받은 뛰어난 지휘관이었지만 자신의 역량이 수부타이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고 자존심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는 호탕함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원정기간 동안 명목상 총사령관에 머무는데 만족하고 수부타이에게 거의 무한한 자율적 지휘권을 일임합니다.

이리하여 몽골제국의 그 유명한 유럽침략이 시작됩니다.

6. 웅대한 대전략

유럽원정군의 총병력은 정확한 수치가 나와있지 않습니다. 몽골 역사서에는 오고타이가 15만병력을 출병시켰다고 하는 얘기가 있지만 당시 몽골제국의 징집병과 점령지 주둔군을 제외한 가용 주력 총병력은 30만 이하로 추산되며 남송과의 전쟁에서 병력이 항상 더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실 유럽원정군에 15만기병을 편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습니다.

최근 학자들의 추산으로는 몽골의 유럽원정군은 7만전후로 추산되며 최대가 10만에 달하고 최소 5만까지 내려간다고 합니다.

서기 1236년. 수부타이가 이끄는 7만 병력의 유럽침공은 그 시작부터 고대전술의 상식을 완전히 깨버리는 파격적인 전략이었습니다.

 

수부타이는 일부러 일반적으로 군사를 부리지 않는 겨울철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강들이 모두 꽁꽁 얼어붙을 때까지 기다린 것이죠. 그리고 때가 오자 전병력을 진군시킵니다.

-한겨울에 유라시아 대륙 횡단- 이라는 이 어처구니없는 대전략을 실현시킨 수부타이의 진군거리는 총 7천km. 지구둘레의 6분의 1을 겨울철에 주파한 이 대전략은 이전까지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역사상 가장 무모한 최대 스케일의 전략이었습니다.

 

일반적인 몽골기병의 강행군 속도마저 훨씬 초월한 이 행군에 의해 몽골의 침략 소식이 알려지는 속도보다 훨씬 빨리 유럽땅에 발을 디딘 수부타이는 곧바로 북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모스크바로 향합니다.

7. 지옥이 되는 러시아

수부타이는 리아잔,콜롬나,수즈달을 모두 함락시키고 대학살을 자행한 뒤 모스크바까지 파죽지세로 함락시킨 후 블라디미르까지 떨어뜨려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러시아 북부를 거의 초토화시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수부타이의 너무나 빠른 기동전략에 농락당하여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러시아의 대공 유리 2세가 마침내 병력을 끌어모아 반격에 나섰지만 이마저도 순식간에 격파당하고 대공의 목이 잘리며 러시아 북부는 완전히 무력화 됩니다.

약탈과 학살. 러시아 북부에 한바탕의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그렇게 러시아 북부를 초토화시킨 후 수부타이는 말머리를 남서쪽으로 돌려 과거 20년전 그 자신이 제베와 함께 쑥대밭을 만들었던 키예프 공국으로 다시금 침공을 개시합니다.

 

1240년. 옛날 수부타이의 2만군대에게도 농락당했던 키예프 공국은 2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별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11월에 키예프가 함락되면서 러시아인들의 항전은 완전히 끝이 났고 나머지 잔당들마저 모두 소탕되어 수부타이의 4년간의 러시아 원정은 이렇게 마무리 되고 이후 킵챠크 칸국이 건립되어 바투가 초대 칸이 되어 러시아를 다스리게 됩니다.

그후 러시아는 200년이 넘도록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8. 불타는 동부유럽

서기 1240년. 수부타이의 러시아 원정이 거의 막바지에 다를 무렵, 당시 유럽의 가장 강력한 군주중 한명인 헝가리의 국왕 벨라4세는 상당히 흥미로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갑작스레 수십만에 달하는 러시아 유민들이 한꺼번에 헝가리로 쏟아져 들어와서는 국민으로 받아들여줄 것을 요청했는데 모두 초라한 행색에 대부분 겁에 질려 있었고 몇명은 지옥의 군대가 지척에 와 있다는 알수없는 소리를 해댔습니다.

벨라 4세는 일단 이 유민들을 모두 기독교로 개종시키면 자신의 권위가 한층 올라갈 것이라 보고 기뻐하여 이들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이 하는 “지옥의 군대” 소리에는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걸 황당한 소문쯤으로 치부한 벨라4세는 설령 그 지옥의 군대라는게 쳐들어 온다 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헝가리의 국력은 막강하여 신성로마제국과 함께 유럽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죠.

 

서기 1241년.수부타이의 헝가리 침공이 시작됩니다.

수부타이는 먼저 헝가리를 치기 전,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해 바이다르와 카단에게 병력을 떼어주어 폴란드와 보헤미아 지역을 침공토록 하는데 여기서 유럽의 튜튼기사단,폴란드,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처참히 박살납니다.

 

직후 수부타이는 분견대를 파견하여 교란작전을 펴는 동시에 부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헝가리를 침공하는데 이 동시다발적인 난타에 헝가리 국왕 벨라4세는 정신을 못 차리고 이리저리 휘둘리게 됩니다.

파상공세에 이리저리 휘둘리던 벨라4세는 결국 총병력을 끌어모아 일대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합니다. 원군을 요청하는 파발들이 유럽으로 흩어졌고 헝가리 전체에 병력 총동원령이 내립니다.

9. 모히 회전

헝가리와 동유럽 전체의 운명을 건 일대 회전이 벌어지기 전, 전유럽에서 지원군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합니다.

교황이 십자군을 호소했고 당시 유럽최강국인 신성로마제국에서도 원군이 파병되었습니다.

 

유럽최강의 명성을 자랑하는 튜튼기사단과 템플기사단,크로아티아왕국,신성로마제국,그리고 헝가리의 전 병력이 동원된 군대의 위용은 실로 압도적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0만(학자들의 추산으로는 6만 전후,최대 8만.)에 달하는 대군이 드디어 진군을 시작했고 이에 맞서는 수부타이의 7만군대(실제로는 4만 전후)는 짐짓 겁먹은 척 군대를 후퇴시킵니다.

하지만 후퇴속도를 조절하여 연합군이 추격할 수 있도록 후퇴했는데 9일에 걸친 추격전은 사요(Sajo)강변에 이르러 끝이 납니다. 두 군대는 사요 강을 사이에 두고 진형을 배치합니다.

셀수 없이 많은 영주들과 기사단,왕들의 깃발이 나부끼는 10만대군의 위용은 장엄했습니다. 하지만 연합군의 진형은 너무 밀집되어 있었고 돌다리 근처에 약간의 수비병을 배치했을 뿐, 기병을 이용한 정찰도 게을리한 연합군의 모습을 보며 이미 유럽보다 훨씬 막강한 이슬람과 중화를 상대로 승리를 거듭한 수부타이와 몽골의 지휘부가 보기엔 어이가 없을 만큼 오합지졸로 보였을 겁니다.

수부타이는 이미 주변지형에 대한 정찰을 모두 끝마친 상황이었고 도강지점도 미리 다 파악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3만의 기병력을 밤새 뒤로 빼어 이미 몰래 도강을 시켜놓은 뒤였죠. 그리고 날이 밝자 바투의 지시로 인해 공성병기를 이용한 포격명령이 떨어지며 모히 회전이 시작됩니다.

 

대군의 도강이 힘든 상황을 이용, 공성병기를 포격에 이용한 것은 회전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 유럽 연합군은 당연히 속수무책, 진형이 흔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바투의 지휘 아래 몽골군의 기병이 엄호포격과 함께 도강을 시작했고 연합군은 필사적으로 대열을 지키고 몽골 기병의 도강을 막아냅니다.

하지만 이 모든건 수부타이의 작전이었습니다. 전방 포격과 함께 기병의 돌격으로 연합군 진형의 무게중심을 전방으로 쏠리게 하기 위한 계획이었죠. 계획대로 연합군은 전력을 전방중앙, 돌다리 근처에 집중시켰고 바로 이 때 수부타이가 밤새 미리 도강시켜놨던 3만의 기병대가 나타나 연합군의 허술한 측면을 난도질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반포위 당한 채 정면에서는 공성병기에 의한 돌과,불붙은 나프타,화살 공격이 퍼부어지고 측면은 궁기병과 중기병에게 이중주로 난자당하는 상황에서 연합군은 이미 승리는 물 건너갔음을 직감하고 단 하나 남은 활로를 향해 도주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몇몇 기사들이 활로를 뚫고 틈새를 만들어 탈출했는데 그러자 결국 연합군 전 병력이 그곳이 살길이라 믿고 그 틈새로 몰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틈새마저 사실은 수부타이의 계획에 들어가 있던 일종의 ‘거짓활로’ 였습니다. 일부러 연합군이 한 곳으로 몰리도록 고의적으로 길을 만들어준 거였죠.

이 틈새를 뚫고 나온 연합군을 맞이한 것은 어느새 쌩쌩한 말로 갈아탄 채 기다리고 있던 몽골의 기병대였습니다. 이때부터는 더 이상 전투가 아닌 학살이었습니다.

 

모히 회전은 결국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이 회전에서 유럽 연합군과 헝가리의 전 병력이 전멸 당했으며 헝가리 국왕 벨라4세는 간신히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10. 발가벗겨진 유럽

모히 회전을 끝으로 유럽은 더 이상 몽골의 군대에 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강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군대가 패한 이상 더 이상 수부타이의 진군을 막을 군대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죠.

수부타이는 헝가리 전역을 초토화시킨 후 이제 무인지경이 된 동유럽 전체를 휘젓고 다닙니다. 거칠 것이 없어진 수부타이는 오스트리아의 빈까지 치고 올라갔고 남쪽으로는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까지 쳤으며 무저항 상태로 열린 서유럽을 공략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으로의 침공 준비를 시작합니다.

매일매일 동쪽에서 밀려오는 유민들과 그들이 들려주는 “지옥의 군대” 에 의한 공포 때문에 서부 유럽 전체가 패닉에 빠져버립니다. 교황도,황제도,왕들도,대공들도 모두 벌벌 떨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신을 향한 기도의 소리가 온 유럽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서기 1241년 12월. 곧 모든 군사를 몰아쳐 당초 장담했던대로 서쪽끝까지 나아가 모든 땅을 정복하겠다던 목표의 달성을 거의 목전에 둔 순간,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서 긴급문서가 바투와 수부타이에게 전해집니다.

그 긴급문서의 내용은 바로

-유럽의 구원자 오고타이 칸,역대급 타이밍 사망-

…으로 인해 새로운 대칸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가 개최되니 몽골의 모든 황족들은 신속히 카라코룸으로 복귀하여 쿠릴타이에 참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칸의 추대를 위한 쿠릴타이는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사항이었기 때문에 황족인 바투와 함께 군을 이끌고 있던 수부타이는 어쩔수 없이 초원으로 회군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운 좋게 몽골군의 학살을 면했던 달마티아와 세르비아,불가리아가 재수없게도 수부타이의 귀국 경로에 포함되는 바람에 철저히 파괴 당하고 그걸 마지막으로 유럽의 공포는 일단락 됩니다.

만약 오고타이 칸이 1,2년만 더 연명을 했더라면 어쩌면 영국을 제외한(수전에서 몽골군의 전투력은 다른의미에서 작살나죠;;;) 서유럽 전체는 물론 교황청마저 함락당했을지도 모릅니다.

11. 죽음

서기 1246년. 칭기즈칸과 오고타이 칸에 이어 3대 칸에 추대된 구유크 칸은 유럽에서 돌아온 수부타이에게 남송정벌군 총사령관직을 위임합니다.

하지만 이미 수부타이는 세수가 70으로 고령의 나이였고 당시 이미 한쪽 눈이 멀고 몸이 쇠약해져 말도 타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결국 구유크 칸은 아쉬워하며 수부타이의 은퇴를 허락했고 수부타이는 그리운 고향 대초원으로 돌아가 거기서 여생을 보낸 후 톨라 강변 근처의 자신의 집에서 편안히 숨을 거둡니다.

서기 1248년. 군대를 이끌고 거의 전세계를 누비고 다녔던 위대한 장군이 별세합니다. 향년 72세에 맞이한 죽음이었습니다.

그의 사후 수부타이의 일족은 몽골제국의,정확히는 이후4칸국 중 대칸국(원) 의 4대명문가로 권세를 떨치게 되고 아들인 우량카다이와 손자인 아쥬 또한 대칸을 섬기는 장군으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12. 칸의 방패,전장의 개,용맹한 초원의 전사

평생에 걸쳐 무자비한 학살을 거듭한 학살자였지만 군사학적으로 볼때 수부타이는 몽골제국의 전장의 개, 세 명의 칸을 섬긴 백전노장으로서 그 전술의 탁월함이나 전략의 스케일에 있어서 그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위대한 전략가들을 압도할 정도로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32개의 나라를 정벌하거나 멸망시켰으며 65차례의 회전에서 승리하였으며 이슬람,동아시아,유럽 모든 문명권을 상대로 싸워 이겼을 뿐더러 4개월에 걸친 전투에서 자신보다 5배나 많은 적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용맹한 대전략가들이 발에 채일 만큼 즐비한 몽골제국의 역사에서도 당당히 최고의 장군으로 꼽힙니다.

혹자는 칭기즈칸과 그의 손자들과는 달리 칭기즈칸의 아들들은 군사적 역량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걸 근거로 만약 수부타이가 없었다면 칭기즈칸 사후 몽골제국의 정복활동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을 거라고도 합니다.

수부타이와 그의 군대의 전술은 속도전, 기동전, 기습전, 포위전, 침투전, 초토화전과 같은 현대 군사학의 토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인,기만,화약을 이용한 심리전이나 겨울철 혹한기 전투수행 등 이전까지 존재했던 상식을 깨고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렸으며 이후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군사 전략가들은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출처 – 알린넷 (//www.alrin.org/thisthat/2331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