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육군의 전설, 6사단 청성부대의 업적

  						  
 								 

 

대한민국 창군이래 가장 큰 업적을 이룩한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

“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

오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어 놓은 세계 육군 역사에 남을 업적을 이룩한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6사단 청성부대는 1948년 4월 29일 서울 은평구 수색동에서 창설된 ‘조선 경비대 제4여단’이 시초였습니다.

그 후 2개월 뒤인 6월 14일 충북 충주에서 지금의 제6 보병사단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사단으로 승격된 뒤, 강원도 원주에서 주둔하였고, 이후 춘천지역 일대의 38선 경계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때 사단장이 ‘김종오 사단장’입니다

 

그는 북한군의 남침이 의심되자 이에 대비하여 주둔 지역의 진지 공사와 병사들의 군사교육, 전투훈련 등으로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습니다.

6.25 전쟁 시작과 함께 국군의 대부분 부대가 북괴군에게 개전 초기에 섬멸되거나 후퇴했던 것과 다르게 김종오 사단장이 이끄는 6사단 청성부대는 북괴군의 남침에 미리 대비하였기 때문에 이후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업적을 세우게 됩니다.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의 전설적인 업적

한국 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의 병력은 국군의 약 2배였으며, 전쟁 물자 역시 이미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은 남침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북한군의 남침전략

 

북한군 1군단이 서부전선에서 서울을 점령한 후, 2군단이 동부전선에서 춘천을 점령하고 수원으로 진격하여 서울에서 후퇴한 국군의 주력부대 후미로 돌아 차단한 후, 1군단과 앞뒤에서 포위하여 섬멸하는 전략입니다.

 

6.25 전쟁 하루 전, 6월 24일 당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그동안 유지했었던 국군의 비상경계령을 해제시켰습니다.

때문에 장병들의 외출과 휴가로 전선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개전 초기 북한군의 물량공세에 국군은 맞서 싸울 인원조차 부족한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김종오 사단장은 6사단장에 부임한 후 전쟁이 임박했음을 직감했고 전선에서 장병들의 휴가 대신 군사교육과 정신교육, 방어 진지 공사를 함으로서 개전시 북한군들을 맞아 잘 싸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1. 춘천 전투의 업적

6.25 전쟁 발발과 동시에 완전 무장한 북한군의 기세에 당시 국군의 다른 사단들은 패배와 후퇴를 거듭했지만, 6사단 천성부대는 홀로 후퇴없이 춘천지역을 사수하며, 밀려오는 북한군들을 모조리 격퇴시킵니다.

더 가공할 일은 1개 사단이 북한군 1개 군단을 맞아 싸우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오히려 역습을 감행하여 더 큰 피해를 입히는 등 용맹함과 대범함까지 보였습니다.

 

북한군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북한군 2사단 병력이 춘천과 가평을 경유해서 후퇴하는 국군을 포위한 후 섬멸 작전을 펼쳐야 하는데 당시 청성부대가 미리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 2사단의 계획은 실패합니다.

이때 북한군 2사단은 7연대 자주포까지 대동한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청성부대의 방어 진지를 뚫으려 하지만 오히려 청성부대 특공대의 육탄 화염병 공격에 자주포는 파괴되고 말죠.

이때 운용되었던 자주포가 북한에서 지금도 운용 중인 SU-76 자주포입니다^^

 

이렇게 북한군 2사단의 계획이 실패한 후, 7연대까지 대패하자 북한군은 무리수를 둡니다.

사단 예비전력인 17연대까지 합동하여 청성부대의 방어선을 뚫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청성부대에 의해 2사단 전력의 40%가 궤멸 당합니다.

 

당시 국군의 상황을 알아보면, 완전 무장한 북한군에 비해 병력과 장비는 너무나 열악하였고, 국군의 사단 규모 자체도 1만여 명이 안되는 수준이었습니다.

탱크를 앞세워 돌격해오는 북한군과 다르게 전투에 대한 개념 자체도 부족한 실정이었지만 6사단 청성부대는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북한군의 남침 전략의 전반을 흔들어 놓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이렇게 6사단 청성부대가 막강하게 대응하자 북한군 2군단장 김광협은 6사단을 포위하여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홍천으로 향하고 있던 12사단과 603 모터싸이클연대를 회군시켜 청성부대가 주둔한 춘천 점령을 명령합니다. (북한군 2군단장 김광협의 판단은 이후 2군단의 몰락의 원인이 되죠.)

북한군 12사단이 2군단과 합류하여 공격해오자 청성부대는 큰말고개와 원창고개에 다시 방어선을 만들고 싸웠는데, 이때 북한군 병력과 함께 전차 10여 대를 다시 격파하면서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또한 김종오 사단장의 명령으로 북한군 12연대를 맞아 싸우고 있던 국군 2연대를 지원하러 보냈던 16포병 대대는 북한군 12사단이 회군하자 12사단과 603모터싸이클부대를 역습, 화력을 쏟아부어 궤멸시켜버리는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청성부대의 활약으로 북한군의 남침전략이 틀어지자 북한군 7사단이 2군단과 합세하여 다시 춘천 공략에 나서자 당시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전선의 단절과 청성부대가 고립, 섬멸될 것을 우려하여 김종오 사단장에게 전략적 후퇴를 명령하였고, 결국 7월 1일 6사단은 춘천을 북한군에게 내어주고 충주로 후퇴합니다.

 

당시 상황을 다시 종합해보면, 개전 후 이미 수도가 함락되었고, 국군의 주력부대가 패퇴한 상황에서 6사단 청성부대는 중동부전선에 홀로 남아 남하 중인 북한군 전력의 반을 소멸시켜버렸습니다.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6사단 청성부대는 북한군 2군단에 비해 엄청난 열세를 알 수 있습니다.

기계화는 커녕 제대로 된 장비도 없는 상태였고, 병력 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는 차이를 보였으며, 소련에서 지원받은 장비로 무장한 북한군을 상대로 이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춘천 전투에서 양측 피해 현황만 살펴봐도 6군단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편제도 제대로 안 된 상황에서 김종오 사단장의 지휘 아래 춘천, 홍천, 인제 일대에 구축한 방어선으로 북한군 1개 군단(2군단)을 6사단 혼자서 궤멸시켰습니다.

결국 UN군의 상륙과 부산으로 진격하는 북한군의 주력 부대의 남하를 지연 시킴으로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어놓는 전과를 올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한 달 뒤, 1950년 11월 25일, 중공군의 개입

북한군의 전세가 기울어지자 중공군 대규모 개입으로 국군과 연합군은 1.4후퇴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해 4월 공세에서 사단은 화천군 사창리 전투에서 중공군을 맞아 싸우다가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후퇴를 결정, 대패하게 되죠.

그 후 김종오 사단장의 교통사고로 장동영 장군이 6사단자에 임명되었고, 6사단을 다시 재편성하여 용문산을 주 방어선으로 하여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였습니다.

 

중공군에게 참패 이후 이를 갈던 6사단은 이후 용문산 전투에서 6.25 전쟁뿐 아니라 세계 육군의 역사에 남을 최고의 전과를 올립니다.

 

당시 장도영 사단장은 청성부대 3개 연대 중 1/3 병력인 2연대를 주 방어선보다 전방인 북한강 인근에 배치하는데 부족한 병력으로 뭉쳐서 싸워도 질 것이 뻔했는데.. 오히려 병력의 1/3을 전방 정찰조로 보내다니.. 2연대의 전투력을 믿었던 것일까요?

 

3. 용문산 전투의 업적

그림처럼 6사단 19연대는 서쪽 방어, 7연대는 동쪽에서 방어선을 지키고, 2연대는 전방에 나가 북한강을 마주보고 방어리인을 배치했습니다.

곧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2연대 예하 1대대와 2대대는 중공군을 공격하였고, 곧 후퇴하여 후방 427고지로 후퇴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점은 1개 연대가 3개 사단을 상대로 공격과 후퇴를 했으면, 이후 당연히 후방의 본대에 합류하여 싸워야 하는데, 2연대는 무슨 이유에선지 427고지에서 후퇴하지 않고 중공군 3개 사단과 예하 포병대의 총공세를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6사단 2연대가 완강하게 버티자 중공군은 2연대의 방어라인이 6사단 주력부대의 주 방어라인으로 착각하여, 모든 병력(3개 사단)을 총동원하여 2연대를 공격했습니다.

이때, 후방의 주 방어선에 있던 6사단 7연대와 19연대는 잽싸게 중공군의 후미로 돌아 포위하여 반격을 시작합니다.

 

당시 중공군들은 자신들의 총 병력인 3개 사단을 앞에서 방어하고 후미에서 국군의 거센 공격이 이어지자 자신들보다 많은 병력이 공격해 온다고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는데, 결국 3개 사단 병력이 1개 연대에 막여 패주하는 꼴이 되었고, 중공군은 양평에서 춘천 그리고 화천까지 무려 80km를 도망만 치다가 화천저수지에서 모두 전멸하고 맙니다.

(세계사에 총이 생겨난 이래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방어작전 사례로 알려짐.)

 

결과적으로 용문산 전투는 1개 사단(대략 1만 명)이 적 1개 야전군(대략 10만 명)을 궤멸시킨 전투입니다. 6사단 청성부대가 왜 국군 최고 사단인지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세계 육군의 전설, 6사단 청성부대의 업적을 정리하면,

1. 국군 최초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음 (6사단 7연대 예하 2대대가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섬멸시킴)
2. 6.25 전쟁 최다 업적 (154회 전투 / 92,669명 사살 / 6,437명 포로)
3. 국군/UN군 최초 압록강 입성
4. 전군 유일 38선 방어 성공
5. 북한군 1개 군단 전투력 상실(춘천 전투)
6. 1개 사단으로 1개 군단 급을 궤멸 시킴 (총기 탄생 이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방어작전)
7. 제2 땅굴 발견
8. 최초로 보병 육탄공격으로 적 전차 파괴

이처럼 6사단 청성부대의 모든 업적을 한 단어로 줄이면,, ‘전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치며, 이제 얼마 뒤면 6월입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호국영령들과 참전유공자들의 헌신을 기억하는 6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 플래시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