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일본인에게 보여주면 목숨걸고 발뺌하는 사진 한 장

  						  
 								 

최근 광주 동구 학동에서 재개발을 위해 철거되던 한 빌딩이 붕괴되며 시내버스를 덮치는 참사가 발생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해당 소식은 일본에도 전해졌다. 해당 소식을 접한 일본인들 중 몇몇은 “안타까운 사고로 목숨을 잃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할 사고다”등의 반응을 보이며 애도를 표했다.

그러나 애도를 표한 사람은 극히 일부였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역시나 한국의 건축은 수준 이하다”, “건축 기술을 일본에서 배워가야한다”등의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해당 사고를 ‘조세이 탄광 사건’에 빗대어 “한국인들은 역시나 묻히는 게 어울리는 민족이다”,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기에 이와 같은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조세이 탄광 사건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의해 강제 징용된 사람들이 말 그대로 생매장 당한 역대 최악의 붕괴 사고다.

이런 조세이 탄광 사건에 빗대어 조소를 날린 일본인에 대해 수 많은 일본인들은 이에 동조하며 “찰떡 같은 비유다”, “이 비유가 맞다. 한국인들에게 딱 어울리는 최후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조세이 탄광 사건은 1939년 7월 일제가 국민 징용령을 발표한 뒤 1,258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징집되어 착취당했었던 탄광에서 발생된 사고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는 자국민들을 투입하기에는 위험도가 높은 지역에 우리의 선조들을 강제로 징집해 배치시켰고 이에 나라를 잃어 저항조차 할 수 없었던 우리 선조들은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

우리 선조들은 이곳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강제 노동을 해야만 했다. 일본 야마구치 현 우베 시에 위치한 중소 규모의 탄광인 초세이 탄광은 바다 밑에 존재하는 해저 탄광이었다.

1914년 일본이 채굴권 획득해 개광한 뒤 1922년 해저 수몰로 휴업에 들어갔다가 1932년 11월 바닷물이 빠지게 되자 본갱을 다시 개광하면서 채탄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채광이 다시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탄광에서 일을 하려고 하는 일본인들은 극히 드물었고 탄광 경영자는 조선인 강제 징집을 선택했다.

그렇게 우리 선조들은 어떠한 안전도 보장받지 못하는 바다 밑 탄광으로 끌려가게 됐다.

당시 상황을 전하는 기록에는 “빛조차 통하지 않는 탄광은 정말이지 작은 지옥이었다”, “가장 힘들고 위험한 작업에는 항상 조선인만이 투입되었다”라고 적혀있었다.

우리 선조들은 국권을 빼앗긴 우리나라가 얼른 광복이 되길 바라며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1942년 2월 3일 갱도가 무너지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바다 밑 암반이 무너지면서 조선인들이 노동을 하고 있던 해저 갱도에 충격이 가해지고 물이 스며 그렇게 갱도가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증언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사고가 발생하기 얼마 전부터 탄광에 물이 샌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목표한 탄광의 양을 채우기 위해 모른 체 했다.

즉 조세이 탄광 사고는 어쩔 수 없이 바생한 자연 재해가 아닌 일본인들의 추악한 욕심과 함께 조선인들을 하대하고 멸시하던 마음이 만들어 낸 인재였던 것이다.

그 안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136명의 조선인들은 물에 빠져 죽거나 흙더미에 깔려 죽음을 맞이했다.  

이 와중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몇몇은 탄광을 빠져나오려 발버둥쳤으나 이를 지켜보던 일본인들은 탄광 입구를 막았다. 결국 우리 선조들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에 조선인들은 격노하며 일본인들에게 책임을 묻고 시신 수습을 요구했지만 “완전히 무너져버린 탄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리다”라는 입장을 보였다.

그렇게 136명의 조선인들은 시신조차 양지바른 곳에 묻히지도 못하며 지금도 먼 타지의 바다 밑에 묻혀버렸다.

해당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은 “일본 절대 용서하고 싶지 않다”, “일본은 진짜 악마 그 자체다”, “이래서 일본은 어떠한 용서도, 이해도 할 필요가 없는 민족이다”등의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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