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는 극혐하는데 유일하게 한국만 찬양하는 위인

2021년 July 15일   admin_pok 에디터

인성에 문제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만 존경받는 위인이 소개됐다.

위인들의 공적을 기리는 내용들이 책으로, 영화로 퍼져나가며 그 중에는 우수한 업적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쓰레기 인성으로 뒤늦게 논란된 위인들도 있다.

첫번째. 간디

먼저 간디는 인도 독립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국부로서 존경받고 있다.

그러나 1948년 사망 이래 세계적인 존경심이 뒤따른 마하트마 간디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이미 영국 등 서양권에서는 간디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논란이 된 것은 간디가 생전 지독한 흑인 인종 차별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간디의 군 복무 기록과 각종 증언, 그가 20여년 간 생활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직접 쓴 노트에 따르면 간디는 흑인을 비하하는 단어 ‘검둥이’라는 인종차별적 표현을 빈번하게 사용했다.

흑인보다 인도인이 우월하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

해당 사실이 드러나자 지난 2018년 아프리카 가나 대학에 세워진 간디의 동상이 철거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는 기간 동안 비타협적 정치인들에게 자행한 여러 테러 행위에 대해 간디가 비폭력이라는 명목으로 묵인한 사례가 여러 연구를 통해 수차례 지적됐다.

2011년 뉴욕타임스 편집장 출신 작가가 발간한 간디 전기에 따르면 생전 간디가 동성 연인과 지내기 위해 자신의 부인을 버렸고, 심지어 “남녀의 성관계처럼 추한 것은 상상할 수 도 없다”는 이성애 혐오 발언을 했다는 주장이 실렸다.

70대 이후 노년에 접어든 무렵에는 17세 조카딸을 비롯 여러 젊은 여성들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등 부적절한 사생활을 지속했다는 주장에 전세계 간디 추종자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두번째. 에디슨

사후 10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발명왕의 대명사로 불리는 토마스 에디슨, 특허를 낸 제품수만 무려 1000개 이상에 달한다.

생전 남다른 발명 의욕을 내비친 에디슨은 특히 백열 전구를 개선, 발전시키고 보급화시켰다.

에디슨이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백열 전구는 사실 영국의 전기학자 ‘조지프 스완’의 발표 논문을 읽고 아이디어를 훔친 것과 다름 없었다.

그런데 에디슨은 오히려 뻔뻔하게 스완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표절했다고 법원에 고소하기까지 했다.

또한 그는 전기 교류 시스템의 위험성을 증명하고자 수많은 동물 실험을 자행한 잔인성도 자랑했다.

일례로 리트리버 강아지를 나무 우리에 집어 넣고 결박한 후 다리에 전극을 부착시켜 차례로 전기 자극을 높여 강아지가 고통에 몸부림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실험을 이어나갔다.

심지어 만 오천명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교류=감전자=위험’이라는 인식을 심고자 같은 방식으로 코끼리를 죽여 교류에 대한 가짜 뉴스를 퍼뜨린 일화도 유명하다.

에디슨은 가정은 전혀 돌보지 않는 일중독자였다. 첫번째 부인이 알콜 중독에 시달리다 병사했음에도 장례식에 방문하지 않았으며, 큰아들은 길거리에서 아사했다.

그나마 잘 자란 나머지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단지 일주일 정도에 불과하다고 밝힐 정도였다.

세번째.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며 물리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 천재 과학자다.

사후 뇌 크기나 모양이 주목 받을 만큼 압도적인 천재성으로 유명하다.

그가 발명한 이론을 바탕으로 탄생한 핵무기를 비롯해 인류의 삶을 변화시킨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03년 아인슈타인과 결혼한 아내 ‘밀레바 마리치’의 폭로로 인해 그의 충격적인 사생활이 드러났다.

두 사람은 대학 CC로 만나 졸업 후 결혼을 했다. 자녀도 둘이나 낳으며 행복한 가정 생활을 이어가는 듯 했으나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친척 누나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가정은 파탄이 났다.

급기야 아인슈타인은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며 자신과 살고 싶다면 “세 끼 식사를 제 시간에 방으로 가져올 것”, “함께하는 여행이나 외출은 절대 꿈도 꾸지 말 것”, “내가 요청하면 곧바로 눈 앞에서 사라질 것”등을 요구하는 조건문에 동의할 것을 종용했다.

아이들을 위해 끝까지 이혼만은 거부했던 밀레바는 결국 아인슈타인의 완강한 이혼 요구에 마지못해 이혼했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친척 누나와 재혼한 뒤 전처도 자식도 버리고 미국으로 망명해 학자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반면 아내는 독일에서 가정교사로 근무하며 홀로 두 아들을 키우다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작성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충격적인 주장이 제기됐다. 그 사람은 아내 밀레바였다.실제로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와 결혼한 지 2년 후에 희대의 저명한 논문들을 여럿 발표한 적 있다.

그러나 당시 아이슈타인은 6일 내내 특허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었기에 연구에 몰두한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었다. 

이 밖에도 아인슈타인 최초의 논문에 밀레바의 이름이 함께 기재되어 있었다는 증언이 존재하고 지인과 주고받은 편지에도 아내와의 공동연구 흔적이 다수 포착됐으나 최종 논문에만 밀레바의 이름이 빠져있었다.

특히 아인슈타인은 노벨상 상금이었던 한화 약 3억원의 돈을 이혼 상태였던 밀레바에게 지급했다는 점에서 공동 연구 이력을 감추고자 돈으로 전처의 입을 막은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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