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최강국 미국이 인도와 파키스탄에게는 꼼짝 못 하는 이유

2021년 8월 9일   admin_pok 에디터

강대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에 아무 말도 못하는 이유가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과거 선제적으로 핵보유국 반열에 올랐던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의 핵 개발을 막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과거 냉전기 때 그토록 싸웠던 미국과 소련도 타국의 핵 개발 문제에는 하나가 될 만큼 핵이 가져다 주는 정치적, 안보적 효과는 대단하다.

그리하여 선제적으로 핵을 보유한 나라들은 국제적인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그들만의 기득권을 이어나가고 있다.

현재 많은 나라들은 강대국들의 압박으로 핵 개발을 포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핵 개발을 감행했음에도 강대국들이 아무 말도 못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인도와 파키스탄이다.

1947년 독립 이후 인도는 인접 국가인 파키스탄 중국과 끊임없이 대립 상태를 이루었다.

파키스탄과는 카슈미르 지역의 영유권을 두고 싸우고 있었으며 중국과는 카슈미르 지역을 포함한 전체적인 국경 문제로 치고 받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갈등한 1962년 인도와 중국 간 국경전쟁으로 이어졌다. 당시 인도는 중국에 처참히 패배하여 분쟁 지역이었던 아크사이친을 중국에 빼앗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1964년, 핵 개발에 성공하게 된다.

이에 인도는 핵 개발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의 초대 총리였던 네루와 후임 총리인 샤스트리는 간디의 비폭력 유산을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핵 무기 개발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자 했다.

대신 자신들의 지정학적인 입지가 강대국들에게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인도는 미국가 소련에게 접근하여 핵 우산을 보장받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 파키스탄과 동맹국이었던 미국은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인도에 대한 안보 보장을 약속할 수 없었으며 소련도 당시 중국과 사이가 안 좋아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인도에게 핵우산을 보내줄 정도로 중국을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미국과 소련 양강은 인도의 핵우산 요청을 거절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상가상 과거 중국이 인도를 붕괴시키던 모습을 지켜보던 파키스탄이 1965년 카슈미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서 인도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인도의 대대적인 반격에 결국 파키스탄은 결국 전쟁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중국, 파키스탄의 침공과 강대국들의 외면을 겪어야 했던 인도는 1974년 마침내 자국의 안보를 위해 핵 실험을 실시했다.

당시 인도는 자신들의 핵 실험은 평화적인 의도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실험 명칭을 ‘미소짓는 붓다’라고 명명했다.

실제로도 인도는 핵 실험 결과물을 군사 무기화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위력은 히로시마 원자폭탄과 유사한 수준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제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그 무렵 인도 내에서도 경제 위기와 각종 정치적 시위들이 터져 나오면서 인도는 핵무기 개발보다 내부적 안정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이념 분쟁으로 중국과 급격하게 사이가 악화된 소련이 인도에 대한 핵우산을 보장해주기로 하면서 1870년대 중반 이후 인도 내 핵 개발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 사이 파키스탄은 여러 차례 인도와 전쟁을 치르며 점차 안보 위기에 휩싸였다.

1965년과 1971년 인도와 파키스탄 전쟁에서 파키스탄은 동맹국인 미국이 주변국들 눈치만 보면서 제대로 된 지원 조차 해주지 않았던 것에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1971년 인도의 파키스탄 내전 개입으로 자신의 영토였던 방글라데시까지 떨어져 나가면서 파키스탄 내부에서는 더 이상 나라의 안보를 외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렇게 파키스탄은 패전 직후인 1972년부터 핵무기 개발을 본격화했다.

파키스탄의 이러한 소식에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가 급파하며 핵 개발을 멈출 것을 종용했지만 이미 파키스탄은 미국에 대한 배신감으로 가득차있던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과 대적하고 있던 중국이 파키스탄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을 이어나가자 더 이상 파키스탄은 미국에 얽매일 이유가 없었다.

또한 파키스탄 내 반미 감정으로 미 대사관 습격까지 벌어졌고 이 사건으로 미국은 파키스탄에 대한 모든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중단했다.

이러한 미국의 조치에 파키스탄 당국의 반발도 거세졌으며 1970년대 말부터 양국은 서로를 더 이상 동맹국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공산주의 정권에 대항하여 이슬람 세력들이 대대적으로 무력 저항을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내전을 진압하고 공산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소련이 직접 개입을 천명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하게도 미국은 소련의 남하와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서 아프가니스탄 반군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고 성장한 이슬람 반군 세력이 바로 알카에다였다.

여하튼 미국은 당시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위해서 주변 전초기지로 삼을 수 있는 국가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그 국가는 사실상 절연관계였던 파키스탄이었다.

결국 파키스탄은 미국에게 상당한 액수의 경제 원조를 약속했으며 자국의 영토를 이용하는 것을 허락했고 이러한 전략성 중요성으로 인해 당시 미국은 파키스탄이 핵개발을 추진하는 것을 묵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파키스탄의 핵 실험은 미국의 묵인 하에 빠르게 이루어졌다.

1989년 소련이 아프간에서 철수한 이후 미국은 뒤늦게 파키스탄의 핵개발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문제를 삼기 시작했으나 이미 파키스탄의 핵 개발을 멈추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당시 파키스탄과의 관계 향상을 노리고 있던 중국이 핵탄두 디자인 우라늄 재처리 시설 등 핵 개발에 필요한 극비 자원까지 넘겨주면서 미국의 제재는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렇게 파키스탄은 냉전적 상황을 200% 활용하며 1990년 내내 핵개발에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소짓는 붓다’ 개발 등 핵 개발 기술을 상당수 확보했던 인도 또한 파키스탄의 핵 개발에 긴장하며 핵무기 보유에 대한 필요성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결국 1998년 4월, 파키스탄이 마참내 핵무기를 실어나르기 위한 탄도 미사일 실험에 도입하자 인도 또한 본격적인 핵무기 실험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8년 5월 11일 인도는 핵실험을 강행하며 스스로 핵보유국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마찬가지로 1998년 5월 28일, 파키스탄도 핵 실험을 강행하며 핵보유국이 되었음을 선언했다.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 개발을 감행했다는 이유로 미국과 서방의 제재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2001년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했다.

미국이 소련을 방해하기 위해 지원했던 세력 ‘알카에다’는 결국 미국을 위협하는 거대 테러 세력으로 돌아왔고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눈이 돌아버린 미국은 파키스탄을 향해 “전쟁 수행을 협력하지 않으면 파키스탄을 석기시대로 만들겠다”고 협박했고, 파키스탄과 인도는 미국의 전쟁을 전면적으로 지지하게 됐다.

이 때 파키스탄은 협력의 대가로 미국의 대대적인 경제 원조를 받게 되었고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 모두 핵개발로 인한 경제 제재를 해제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양국은 미국의 묵인으로 사실상 핵보유국임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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