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국 망가뜨리려다가 오히려 개망신 당했던 레전드 사건

  						  
 								 

일본이 한국을 무너뜨리고 기세를 살리려다가 오히려 개망신 당했던 사건이 있다.

이런 사단을 만들 수 있었던 건 한국 여자 농구의 전설 박신자 선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신자 선수가 농구 선수의 꿈을 키우던 1950년대는 농구계의 지원도, 그녀를 가르쳐줄 만한 인물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탁월한 재능에 더불어 끊임없이 노력을 할 수 있는 열정까지 갖추었다.

학창시절 그녀는 ‘백 년에 한 사람 날까 말까 한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농구 실력이 출중했다.

중학교 2학년에 이미 대표선수로 뽑혀 홍콩 마닐라에서 전승의 기록을 세우는 등 어린 나이에 벌써 한국 농구 역사에 대단한 발자취를 남겼다.

1961년 2월 14일 일본농구협회의 초청으로 일본 일류급 여자 실업농구팀과 경기가 있었다.

당시 일제강점기가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으로 전국민이 일본에 대한 분노를 갖고 있었던 때였다.

일본 측에서는 한국을 ‘자신들이 식민 지배했던 나라’ 정도로 여기며 당연하게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박신자 선수는 보란듯이 9전 전승의 기록을 세우며 일본 여자 농구계를 완전히 박살냈다.

사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풀 죽어있는 자국민의 기를 살리기 위해 일본 내 최강이었던 ‘니찌보 히라노’팀의 상대로 한국의 여자 농구팀을 초청했던 것이다.

경기를 마친 뒤 일본 선수들은 “박신자가 있는 한, 일본은 한국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박신자 선수의 농구 실력은 대단했다.

해당 경기로 인해 한층 더 풀이 죽은 일본 선수들과는 달리 대승을 거둔 우리나라의 선수들은 기뻐 날뛰었다. 경기를 보던 한국 관객들도 기뻐했다.

박신자 선수는 이미 대단한 업적을 많이 세웠지만 1967년 그녀를 주축으로 한 여자농구 대표팀이 체코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 대회에 나갔다.

1967년은 냉전의 매서움이 전세계를 감싸고 있던 시기로 공산주의 국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이 서로를 탐탁치 않았던 때였다. 당시 한국은 ‘미제의 주구’라고 불리며 많은 나라들에게 미운 털이 박혔던 시기였다.

일본 주재 체코 대사관에서는 우리나라의 선수들의 비자도 쉽게 내어주지 않는 등 대한민국 여자 농구팀은 참가부터 쉽지 않았다.

어찌어찌 경기장에 도착한 우리 선수단은 190cm 이상의 장신 선수들이 많은 서구권 국가의 선수들과 맞붙어야만 했다. 신체조건, 훈련 방식, 팀 구성 등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을 상회하는 팀들을 상대해야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수단은 190cm가 넘는 선수가 대부분이었던 동독팀을 꺾었고, 일본도, 유고 슬라비아도, 이탈리아, 개최국인 체코마저 꺾었다.

아쉽게도 당시 스포츠 종주국이었던 소련에게는 패배했지만 우리나라 선수단은 2위를 차지해 준우승했고, 대회의 MVP도 박신자 선수가 받았다.

이처럼 1960년대에 세계무대에 나서 승승장구했던 박신자 그리고 여자 농구팀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희망이었다.

박신자 그녀의 이름은 1999년 미국에 위치한 여자 농구 명예의 전당 회관의 초대 헌액자 명단에 아시아인 최초로 오르기도 했다.

은퇴 후 그녀는 농구단 감독, 올림픽 조직위원회, 아시아농구연맹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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