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만약 100년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건물 앞을 지나고 있었다면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다.
(사진=샌프란시스코 페리빌딩)
왜냐하면 벌건 대낮에 조선인 하나가 미국인 한 명을 폭행하고 있기 때문. 심지어 그 청년은 총을 갖고 있지만 쏘진 않고 그것으로 때리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더 의문스러운 것은 군중사이에서 숨을 죽인 채 아무도 알지 못하게 그들에게 총구를 향하고 있는 의문의 사내다. 때리는 조선인 맞는 미국인, 그리고 그 둘이 의식하지 못한 그들을 향한 하나의 총구. 그들은 대체 누구길래 난투극을 벌이며 그 자리에 있던 것일까?
1908년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나는 내일 사람 하나를 죽일 것이다..그는 사람의 탈을 쓴 악마. 얼마 전 그가 전 세계의 에디터들 앞에서 내뱉었던 말을 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일본이 조선을 보호해 조선인들은 좋은 일이 많습니다. 그들은 옛 정부의 학대를 받지 않으니 일본을 매우 환영하고 식민지가 되길 원합니다.’ -1908.3.21. 미국 에디터 인터뷰 中
(사진=D.W 스티븐스)
“을사늑약을 맺도록 주도하고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의 입맛대로 쥐락펴락한 민족의 원수,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
(사진=전명운 의사)
“나 전명운은 그놈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를 죽여 일천만 민족의 울분을 갚으리라.”
20살의 나이에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 막노동을 하며 학업을 이어가던 청년 전명운, 그는 스티븐스의 망언을 들은 후 스티븐스를 암살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결전의 날을 준비한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권총을 사고, 그의 동선을 파악하여 암살 장소와 시간을 정한 전명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렇게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그는 스티븐스와 마주한다.
이제 수없이 연습한 것처럼 방아쇠를 당겨 그의 심장을 꿰뚫기만 하면 되는 상황, 두어번 숨을 고른 청년 전명운은 군중들 사이에 숨어 그를 향해 권총을 발사한다. 그런데,
‘딸깍..’
“….?”
방아쇠를 당긴 그의 권총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딸깍..딸깍..딸깍…’
몇 번이고 방아쇠를 당겨 봐도 부자연스러운 소리만 반복될 뿐이었다… ‘불발’
총이 불발된 순간, 그는 스티븐스를 향해 내달렸다. 불발된 이상 이제 주먹으로 스티븐스를 처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렇게 몇 분간, 두 사람의 목숨을 건 몸싸움이 이어진다.
“이대로는 이놈을 죽이지 못하고 잡히고 만다..”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느낀 전명운 의사, 그는 훗날을 도모하고자 마음먹고 현장을 벗어나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런데 그 순간
‘탕!’
마치 그 둘이 서로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군중 사이에서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순간 전명운의 어깨에선 피가 솟구쳤고, 그대로 그는 쓰러졌다. 그의 계획이 실패한 것일까?
‘탕! 탕!’
곧이어 다시 두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이번에 그 총이 향한 곳은 전명운이 아니었다.
총알 두 발은 전명운 의사의 주먹질로 반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던 스티븐스의 가슴과 허리를 정확히 꿰뚫었다.
전명운과 스티븐스의 몸에 박힌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쏜 세 발의 총탄. 총을 쏜 주인공은,
스티븐스 처단을 위해 그 자리에 있었던 장인환 의사였다. 전명운 의사의 총이 불발되자 마치 계획이라도 했다는 듯 그를 도운 장인환 의사, 이 일련의 과정은 모두 의도됐던 것일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일은 전혀 계획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던 것… 서로 안면도 없는 그들은 아무런 사전 계획도 없이 같은 날짜,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우연의 일치로 한 자리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장인환 의사가 쏜 총을 맞은 전명운 의사와 스티븐스는 같은 병원에 긴급 후송되고,
(사진=스티븐스의 사망 진단서)
다음날 총알 제거 수술을 받던 스티븐스가 사망하면서 그들의 계획은 성공한다. 두 위인의 기가막힌 만남은 그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의열 투쟁이라는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지만, 두 사람은 재판을 피할 수 없었다. 스티븐스 사망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장인환 의사는 징역 25년, 전명운 의사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 받았다.
영화 같은 이야기의 두 주인공
하지만 그들의 여생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다. 11년의 복역 중 가석방 된 장인환 의사는 1927년 4월 한국으로 귀국했으나 일본의 감시 때문에 그해 10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이후 3년 동안 우울증을 앓았던 그는 1930년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전명운 의사는 무죄로 풀려난 후 재미 일본인들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고 석방된 지 6개월 뒤에 연해주로 이주, 1909년 봄 안중근과 역사적인 만남을 갖는다.
여기서 안중근 의사는 전명운 의사에게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되는데, 몇 달 후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후 1929년에 부인을 여읜 전명운 의사는 LA로 이주해 세탁소를 운영하며 어렵게 생을 이어가다, 1947년 6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최초의 친일파 처단이라는 역사를 만들어냈지만 외롭게 생을 마감했던 두 사람. 이제 우리는 이들이 백 년 전 미국에 울렸던 그날의 총성을 기억하고 또 그들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출처 – 네이버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