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대상으로 깡패짓 하다가 일본 국회의원 3번이나 당선된 악질 매국노 정체

2023년 May 15일   admin_pok 에디터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인 잔인하게 탄압했던 친일파 박춘금

친일파 박춘금

일제 강점기 시절, 안중근 윤봉길 같은 훌륭한 독립 투사들도 많았지만 을사오적 이완용 같은 친일파들의 수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들 중 조선인 출신으로 본인의 이름 또한 창씨 개명을 하지 않고 조선 이름으로 일본 국회의원에 3번이나 당선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박춘금’ 이라는 인물인데, 지금까지도 친일파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이고 등급이 높은 친일파로 분류 받고 있습니다.

과연 그는 어떤 활동을 했기에 조선인 신분과 조선 이름으로 일본 본토에서 3선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1891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간 친일파 박춘금

친일파 박춘금

1891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박춘금은 가난한 빈민층으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대구에 위치한 일본군 병영에서 급사로 일하던 박춘금은 그곳에서 배운 일본어를 바탕으로 1908년 일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탄광 광부로 일하던 박춘금은 당시 재일 교포들이 만든 폭력조직에 가입하기 시작하며 점차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본인의 영향력을 넓혀가던 박춘금은 조선인 회장으로까지 부임하며 어느덧 일본 내 조선인 세력들의 거물로 성장하게 됩니다.

조선인들을 잔인하게 탄압하며 일본의 지원을 받아 당선된 국회의원

친일파 박춘금

박춘금은 일본에서 야쿠자들의 도움까지 받으며 점점 더 성장했고, 일본 내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상구회’ 라는 단체까지 설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단체는 조선인들을 위한 단체가 아닌 일본 내의 기업가들을 상대로 파업을 진행하는 노동자들을 진압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특히 1923년에 발생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많은 일본인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특히 조선으로 돌아와서도 조선 내에서 일본의 통치 행위에 반대하는 자들을 거침없이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행동으로 일본의 지지를 얻은 박춘금은 1932년 조선인 출신과 이름을 그대로 걸고 파격적으로 일본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이후에도 그는 40년과 42년 선거에서도 연이어 당선되며 3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일제가 패망하자 본인에 대한 복수가 이루어질 것으로 판단한 박춘금은 비밀리에 다시 한국에서 일본 땅으로 향했고, 1973년 사망할 때까지 호가호위하며 잘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신정훈 에디터 ⓒ지식의 정석 (무단복제 및 재배포 금지)/사진 = 유튜브 ‘사건탐구 과거탐구 STG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