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서울 청계천 수상가옥 판자집.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 청계천은 자연상태의 하천이었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서울의 지리적 특성상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도성 한가운데로 물길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가옥이 침수되거나 다리가 유실되고 익사자가 발생하는 일이 흔했는데, 조선 태종때는 ‘개천도감’을 설치해 하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돌다리를 만드는 대대적인 공사를 했다.
태종때 개천공사가 주로 개천 ‘본류’에 대한 정비였다면, 세종 때는 작은 세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청계천은 ‘민족의 거리 종로’와 ‘왜인들의 마을 혼마찌’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는데 당시엔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차별이 선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1945년 해방 즈음 청계천은 토사와 쓰레기가 하천 바닥을 뒤덮고 있는 등 쏟아지는 오수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그리고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이 끝나고, 생계를 위해서 서울로 모여든 피난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변에 정착하면서 반은 땅에 반은 물위에 떠 있는 판잣집을 짓고 생활하였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식민지와 전쟁의 아픔을 겪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슬럼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