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발해인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한국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국가 중 하나인 발해(698~926년). 하지만 926년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한 이후 발해의 흔적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발해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그들의 행방에 대한 다양한 가설과 역사적 기록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아본다.
발해는 문왕(대흠무) 시기 전성기를 맞이하며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국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10세기 초 거란(요나라)의 강성함 앞에 결국 수도 상경 용천부(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부근)가 함락되면서 926년 멸망하게 된다.
거란은 발해의 수도를 점령했지만, 발해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발해의 오경(상경, 중경, 동경, 서경, 남경) 중 일부 지역만을 직접 지배했고, 나머지는 혼란 속에 남아 있었다.
발해 멸망 후 많은 발해 유민들은 고려로 이동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발해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심지어 **”발해는 우리의 형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발해 출신 인물들은 고려 사회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대표적인 사례로는 왕실과 혼인을 맺은 발해 유민 가문, 고려 중기부터 등장하는 발해계 문벌 귀족들 등이 있다.
특히, **발해 왕족 출신 대광현(대인선의 아들)**이 고려로 망명하여 후일 대씨 성을 받은 고려 귀족 가문을 형성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이후에도 발해 지역 전체를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다.
발해의 수도가 함락되자 일부 귀족과 지배층은 고려로 망명했지만, 많은 평민들은 여전히 동북 지역(현 중국 지린성, 헤이룽장성, 랴오닝성)에 남아 생활했다.
그러나 이후 여진족의 성장과 요나라의 지배로 인해 발해 유민들은 점차 동화되거나 사라지게 된다. 특히 여진족이 금나라(1115~1234년)를 건국하면서 발해인의 정체성은 더욱 희미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몽골제국(원나라, 12711368년)과 이후 명나라(13681644년) 시기에 이르러, 발해인의 후손들은 더욱더 중국 북동부 지역에 동화되었다. 일부 발해 후손들은 여진족, 한족, 몽골족 등과 혼합되었고, 점차 발해라는 정체성을 잃어갔다.
그러나 일부 역사 기록에 따르면 청나라(1616~1912년) 시대까지도 발해의 후손들이 동북 지방에서 일정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 초기에도 고려를 거쳐 내려온 발해 유민들의 후손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은 건국 이후에도 동북 지역(함경도, 두만강 유역)과의 연결을 유지했으며, 일부 문헌에서는 함경도 일대에서 발해계 후손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조선 전기에는 “북방 개척 정책“이 이루어지면서, 두만강 너머의 발해 옛 영토로 진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는 발해 후손들이 조선과 어느 정도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발해 멸망 이후, 발해 유민들의 행방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결국, 발해는 거란에 의해 멸망했지만, 발해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려와 중국 동북부, 그리고 여진족 사회에서 다른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한국과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발해의 흔적을 찾으려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으며, 발해인의 후손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도 지속되고 있다.
발해는 사라졌지만, 그 유산과 정체성은 여전히 우리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