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을 게임처럼 운영했던 황제(바실리우스2세)

2025년 3월 20일   admin_pok 에디터

“제국을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운영한 황제, 바실리우스 2세”

“냉혹한 군주, 강철 같은 통치자, 그리고 고독한 황제”

바실리우스 2세(958~1025)는 동로마 제국(비잔티움)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황제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황제’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화려한 궁정 생활도, 대규모 연회도, 심지어 결혼조차도 그에게는 필요하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 제국의 운용만이 그의 인생 전부였다.

사치와는 거리가 먼 황제, 군복을 입고 야전에서 생활하다

바실리우스 2세는 예술과 문화를 즐기는 전형적인 황제가 아니었다. 그는 궁정에서의 연회와 화려한 행사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먹는 것도 평민과 같은 소박한 식사를 했다. 화려한 복장을 싫어해 궁정에서도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전쟁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선두에 서서 싸웠다.

전쟁 중에는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들과 같은 환경에서 생활했다. 다른 황제들이 왕좌에서 명령만 내리던 것과는 달리, 그는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고 직접 지휘하는 황제였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바실리우스 2세는 “지독한 황제”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냉철한 리더십, 감정보다는 전략으로 움직였다

바실리우스 2세는 감정을 배제한 철저한 전략가였다. 개인의 용맹보다는 조직적인 군대의 힘을 중시했으며, 단기적인 성과보다는 장기적인 제국의 발전을 우선시했다.

특히, 그는 한 번 패배한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강력한 군대를 조직했다. 젊은 시절, 그는 불가리아군과의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에서 패배를 경험했지만, 이후 이를 복수하기 위해 군대를 개혁하고 철저한 준비 끝에 불가리아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취한 전략적 조치는 현대의 군사 작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포로 15,000명을 처형, ‘불가르 학살자’라는 별명을 얻다

바실리우스 2세의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은 불가리아 정복전이었다. 그는 불가리아군을 격파한 후 15,000명의 포로를 잡았고, 이들을 100명씩 묶어 한 명만 한쪽 눈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장님으로 만들어 돌려보냈다. 이를 본 불가리아 왕은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이 일로 바실리우스 2세는 ‘불가르 학살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정치도 게임처럼 운영하다, 그러나 후계 문제엔 무관심

바실리우스 2세는 행정 능력 또한 뛰어났다. 그는 재정을 철저하게 관리하여 국가 예산을 몇 년 치나 남길 정도로 풍족하게 운영했다. 또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을 도입했으며, 자신의 임무에 철저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후계자를 남기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결혼조차 하지 않았으며, 형제나 친척들 역시 철저히 배제했다. 오직 자신의 생애 동안 제국을 운영하는 데에만 집중했고, 결국 그가 사망한 후 동로마 제국은 서서히 쇠퇴하게 된다.

그를 사랑한 사람도, 그가 사랑한 사람도 없었다

역사가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바실리우스 2세를 두고 **”비잔티움 역사상 그처럼 고독한 황제는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그를 사랑한 사람이 없었고, 그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심지어 절친한 친구조차 없었다.

그의 삶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 속에서 나라를 운영하는 플레이어처럼 살았던 황제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철저하게 제국의 운영과 전략에만 집중했고, 인간적인 감정이나 개인적인 삶은 철저히 배제했다.

결국, 그는 승리했는가?

바실리우스 2세의 통치는 동로마 제국을 강대국으로 만들었지만, 그의 사후 제국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의 방식은 철저한 승리였지만, 그것이 과연 ‘완전한 성공’이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그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 생을 마쳤다. 그러나 단 하나, 제국 운영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완벽한 군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