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고구려의 안학궁

2017년 July 21일   admin_pok 에디터

한국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고구려의 안학궁

 

안학궁 내전 – 전면 87미터 측면 27미터의 높이 최소 40미터로 한국 역사상 최대의 전각이라 할만하다.

 

안학궁 외전 – 정면 49미터, 측면 16미터로 이 역시 엄청난 규모라 할만하다.

 

1958년, 안학궁의 발굴을 시작했다. <동국여지승람>을 통해서 이미 그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그 규모와 구조를 확인하는 것은 처음.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와서 안학궁의 구체적인 발굴 결과가 나왔다. 그 결과물은 충격적. 흥선대원군이 새롭게 만들었던 경복궁의 면적을 제외하면 한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면적면으로나 건축 규모로나) 궁궐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안학궁은 여러모로 한국 궁궐의 레퍼런스라 부를 수 있는 훌륭한 궁궐이었다. 중국이 왜 고구려에 대해서 궁을 잘 짓는다고 말했는지 손쉽게 알 수 있는 정도다.

고구려는 긴 시간 압록강 이북에 존재하는 국내성을 수도로 삼아왔다. 그리고 장수태왕대에 이르러서야 평양을 수도로 삼아 내려온다.

바로 이 때에 건축된 것으로 보는 평양의 궁궐이 바로 안학궁이다. 이후 안학궁은 장안성(평양성)이 축조되어 천도하기 이전까지 고구려의 수도 평양의 중심 궁궐로서 활용되었다.

안학궁의 남문으로부터 대동강까지 아주 잘 닦여진 대로路가 존재하는데, 이 길의 좌우로 거대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아마 귀족들의 집을 비롯해 관청들이 잔뜩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안학궁과 그 남쪽으로 형성된 시가지.

본론인 안학궁 이야기로 돌아와서, 대체 안학궁의 규모와 구조가 어떠했길래 많은 역사학도들과 역사학자들이 찬사를 보내는 것일까.

궁궐이란 기본적으로 화려해야 제맛이다. 화려하고 멋진 궁궐은 그 나라의 국격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또한 화려하고 거대한 궁궐을 가진 나라는 그 만큼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평할 수 있는데, 궁궐을 짓는대에는 인력과 기술이 막대하게 들어가기 때문이다.

먼저 살펴볼 것은 안학궁의 면적이다. 궁성 한 변의 길이는 622미터, 둘레는 38만 평방미터로 41만 평방미터인 대원군의 경복궁(조선 전기의 경복궁은 35만 평방미터)을 제외하면 한국 역사상 가장 면적이 거대한 궁궐이다.

그 안에 21채의 전각과 31채의 회랑이 들어섰었고 궁궐의 둘레는 성벽으로 감쌌다. 이 성벽의 경우 토축과 석축이 섞여있다고 알려져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높이는 4미터 가량이나 추정되는 실제 높이는 6~12미터이다.

6~8미터라면 수원 화성의 높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고, 10미터를 넘겼다면 중국의 자금성 성벽 높이와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3D 복원 전경

 

동시대 당나라 중궁인 대명전보다 규모가 컷던 중궁 (참조: 일본동대사의 세계최대 목조건물이37-50.5 미터, 그보다 전시대였던 안학궁의 중앙궁궐이 한면 45미터)-

규모가 다는 아니지만 솔직히 여러모로 규모가 세계문화유산으로써의 가치에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의 거대건축문화재에 대한 갈증을 풀어줄만 합니다.

 

안학궁옆의 거대성인 평양성입니다.
(북한의 국보 1호- 사진은 1719년에 재건된 4세기 평양성 내성북문)

 

유명한 ‘월야선유’도의 평양성곽입니다.

 

평양성의 바깥성벽은 금수산의 모란봉을 북쪽 끝으로 하고 서남으로 을밀대, 만수대를 타고 보통강을 따라 뻗다가 보통강과 대동강이 합치는 목에서 동북으로 꺾여 대동강을 거슬러 대동문을 지나 다시 모란봉에 이르렀는데 그 둘레는 약 16km이다.

평양성 안은 성벽들로 가로막아 내성, 중성, 외성, 북성의 4개 부분성으로 나누었다. 부분성들의 성벽까지 합친 성벽의 총 연장 길이는 약 23km이다.

내성은 을밀대에서 남산재에 이르는 지대를, 중성은 내성의 남쪽 안산에서 동쪽으로 대동강까지의 지대를, 외성은 중성의 남쪽 대동강까지의 넓은 지대를, 북성은 내성의 북쪽 모란봉과 전금문 일대를 포괄한다.

내성은 궁성이고, 중성은 중앙관청들이 있는 황성이며, 외성은 주민거주지역이었다.

안학궁옆의 웅장한 대성산성 성곽입니다.

 

대성산성 근접사진

 

안학궁, 대성산성, 평양성위치.

세 곳의 관계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때는 427년(장수왕 15)이다. 이 당시의 왕궁은 평양시 대성산 기슭의 안학궁이었다. 안학궁 뒤편에 대성산성을 축조해 전쟁 때는 이곳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평지성과 산성이 한 조(組)를 이루는 것은 고구려 도성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산성으로 피란하면 평지성은 불타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586년(평원왕 28)에 수도를 장안성(長安成)으로 옮기는데, 이곳이 현재 평양 시가를 둘러싸고 있는 평양성이다. 안학궁과 대성산성을 전기 평양성, 장안성을 후기 평양성이라고도 한다.

 

자금성의 성벽 높이를 생각하며 안학궁을 둘러싼 성벽을 상상해보자

안학궁의 구조에 대해 말해보자면 완벽한 정방형의 궁은 아니다. 발굴조사 결과 마름모꼴에 가까울 정도로 기울어있는데, 이는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이야기일뿐 그 안에 들어가있는 전각들이나 회랑의 경우 완벽하게 정방형의 모양새로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성문은 총 6개. 동북에 하나씩 존재하고 남쪽에 3개가 존재한다. 즉, 3개의 문은 출입하는 사람의 계급을 분류하여 출입하도록 되어있었다고 추정이 가능하다.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인데, 바로 안학궁 안의 전각 규모에 대한 이야기이다.

안학궁에서 바로 이 전각의 규모가 여러모로 역사학도들을 흥분하게 하는 부분이다. 안학궁의 주요 전각은 총 3개라고 할 수 있다. 남궁의 외전이 있는데, 정면 11칸의 49미터에 이른다.

현재 남아있는 경복궁 근정전이 정면 5칸 30미터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 남궁의 외전의 정면 길이는 근정전을 훨씬 상회한다는 것.

역사학도들의 상상력을 자극할만 하지 않은가? 그런데 아직 본론은 나오지도 않았다. 안학궁 정전의 메인디쉬는 바로 중궁 내전이다. 정면 19칸 87미터 옆면 8칸 27미터의 엄청난 규모의 전각이기 때문이다.

경복궁 근정전이 30.14미터, 황룡사 금당이 49미터, 중금 자금성 태화전이 60미터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정면 87미터가 얼마나 엄청난 길이인지 상상이 갈 것이다.

바로 이 중궁 내전의 규모 때문에 안학궁은 종종 역사 토론의 장에서 이름이 오르곤 하는 것이다.

게다가 ‘침전’ 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북궁의 전각은 정면 13칸 62미터, 옆면 4칸 10미터로 경복궁이나 창덕궁 안에 있는 임금의 침전과 비교해서 최대 7배에 이르는 대단한 규모다.

 

안학궁 모형 – 어디까지나 발굴 조사에서 알 수 있는 것만을 담은 모형이며 복층 여부 등은 알 수 없어서 담지 않았다.

여기서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하자면 바로 이 안학궁 터에서 치미가 하나 발견되었는데, 그 높이가 무려 2미터를 넘는다.

1.8미터였던 황룡사 금당의 치미보다 훨씬 크고 이 규모는 자금성 태화전이나 현존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는 도다이지(동대사) 대불전보다도 더 크다.

즉, 안학궁의 전각들은 정면의 길이만 긴 것이 아니라 높이 역시 도다이지 대불전과 같이 어마어마한 규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이 안학궁에 대해서 역사학도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다.

사실 이는 역사학도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고궁이라고 하면 기껏해봐야 경복궁이나 창덕궁등을 떠올리며 일본이나 중국의 거대한 전각들에 비해서 상당히 규모가 작은 한국 궁궐의 전각들에 대해 한숨만 짓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과연 안학궁의 규모를 보고도 그런 한숨이 나올까? 아니, 애당초 고려시대까지의 한국 궁궐은 규모가 아주 장대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기껏 도다이지 금당이나 자금성 태화전 정도에 압도당하진 않을 터이다.

 

도다이지 대불전의 규모는 정면 57미터, 높이 50.48미터로 안학궁의 중궁 내전은 이보다 훨씬 규모가 거대했다.

이런 규모 말고도 안학궁에서는 주목할만한 특징이 몇 더 있다. 건물 배치가 좌우 대칭적 배치를 기본으로 하면서 여기에 비대칭적 배치가 결합되었다.

비대칭법을 적용하는 이유는 건물배치에서 단조롭고 도식적인 느낌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건물배치에서 중심축 위에 놓여있는 기본 건물들이 앞으로부터 뒤로 들어가면서 점차 높아졌으며 건물의 넓이도 뒤로 가면서 넓어졌다.

이는 입체적으로 보이면서 웅장해 보이도록 하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여기서 다시 한번 언급한 내용들을 상상해보자. 얼마나 장대한 규모인지 기가 막힐 정도다.

회경전이라는 엄청나게 거대한 전각이 있었고 계단식으로 만들어져 북으로 올라갈 수록 건물들이 높게 나타났을 고려의 대궐보다도 더 특징적이고 규모가 장대했으리라 생각해보면 고구려의 궁궐 짓는 기술이 상상을 초월함을 알 수 있다.

 

자금성 태화전 – 정면 64미터 측면 37미터 높이 27미터의 규모다.

고구려의 안학궁을 생각하다보면 그 경이로운 규모에 놀라고 안학궁을 짓는 기법과 주변에 성을 배치하는 방법이 그대로 이어져 한국의 궁궐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고구려인들의 유적들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경이로움이 항상 존재하며 안학궁은 그 대표적인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알 수록 보이게 마련이다.

만약 중국이나 일본의 장대한 규모의 고건축에 놀라고 우리의 고건축에 실망을 했다면 먼저 고건축의 아름다움이 반드시 규모와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고건축이 초라해보인다면, 지금 남아있는 고건축물들이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과 규모를 따르고 있을 뿐 우리나라 역사의 건축 규모 전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해보자.

그리고 황룡사, 미륵사, 안학궁, 고려대궐등의 발굴 결과를 보고 CG복원도나 모형을 보면서 마음을 달래보자.

압도적 규모의 고건축물들이 현재는 소실되어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히 우리 역사 속의 건축물 화려함, 규모, 건축 기술 등에서 세계 어느 나라의 목조건축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음을 이 ‘안학궁’을 보면서 떠올려보자.

 

출처 – FM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