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독재정권은 어떻게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을까.
과연 북한에서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는걸까?
한국에는 ‘모의’와 ‘시도’ 정도로만 알려진 이른바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아’ 사건은 사실 북한 최초이자 마지막 반(反)김정일 쿠데타다.
이 사건을 알기 위해선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란
1918년에 설립된 소련군, 러시아군의 육해공군과 공수부대, 전략로켓군 등 전 군의 대위, 소령급 장교의 3년제 고등 교육기관으로 적백내전때 소련군의 총사령관이자 소련군을 대대적으로 개편한 미하일 프룬제의 이름을 따 만들었다.
소련의 합동군사대학으로 엄밀히 말해서는 제정 러시아 시절인 1832년에 개교했지만 공산혁명 이후 붙여진 다섯 번째 이름인 프룬제가 제일 잘 알려져 있다.
북한을 비롯한 소련의 우방국이나 위성국의 장교들도 유학이 가능하고,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한 후에는 한국군 장교도 가서 연수한 바 있다. 북한 정계와 군부의 중요 인물 중에는 프룬제 출신이 적잖이 있다.
북한의 군인 겸 정치인인 오극렬이 바로 프룬제 출신이다.
1991년, 이 프룬제 출신들이 김일성과 짐정일을 사열식에서 탱크로 날려버리려 모의·시도했다는 이야기가 한국에 까지 들려온다. 이 내용인 즉슨 해외 유학경험을 통해 국제정세를 잘 알고 있던 프룬제 출신 엘리트 장교그룹이 구 소련과 중국, 동구권의 개혁개방을 보고서 ‘우리도 변해야 한다’며 쿠데타를 시도했다는 것.
이후 이 사건을 빌미로 일선에서 근무하고 있는 모든 프룬제 출신자들이 대규모로 숙청되기도 했다. 그리고 김정일은 이러한 숙청을 바탕으로 김일성이 마지막으로 쥐고있던 군 인사권까지 갖는 동시에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올라 명실상부한 1인자로 거듭났다.
그러나 이 ‘쿠데타’ 사건 자체가 김정일이 군을 장악하기 위한 조작이었단 말이 많았지만 전 노동당 간부 ‘김일철’이 탈북하면서 그동안 한국 내 소문으로만 존재하던 ‘프룬제 장교 쿠데타’는 사실로 밝혀졌다.
프룬제 장교 쿠데타 사건의 과정
실제 프룬제 출신 북한 장교들은 소련에서 유복한 삶을 살았다. 북한 내 제 2의 소련파를 육성과 소련에 있는 이들의 포섭을 위해 KGB의 공작과 김일성이 내준 장학금, 유학생들의 장사 등이 그들이 유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소련의 사회주의가 붕괴한 후, 북한의 유학생들에게는 ‘평양으로 돌아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북한은 ‘잠시 귀국했다 소련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했지만 유학생들이 귀국한 뒤 말은 바뀌었다.
소련에서의 생활과는 너무 다른 북한에서의 열악한 처우와 자신들이 배워왔던 사회주의에 대한 이념의 차이를 느꼈던 유학생들은 불만을 품기시작했고, 같은 유학생들끼리 뭉쳐 ‘이너서클’을 구성했다.
그리고 1991년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최고사령관 직을 물려주자 크게 반발한 이들은 1993년 김정일을 제거하고 김일성을 국가의 상징으로 내세운 다음에 주체사상으로 왜곡된 북한의 사회주의 노선을 정통 사회주의로 개조하는 ‘쿠데타’를 모의한다.
사실 이들의 목표는 북한의 정통 사회주의화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쿠데타 성공 이후 남한에 침공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되고 길을 잃은 KGB 간부들이 북한에 이들 친소파 장교들의 정보를 넘겨버리면서 김정일이 이들의 이너서클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보위부에게 수사를 명령하여 쿠데타 전모를 밝혀내기에 이른다. 쿠데타 거사일을 뒤로 미룬 상태였던 이들 친소파 장교들은 1993년 기습적인 체포작전으로 줄줄이 끌려갔고 200명의 유학파 장교들이 총살되었다. 한때 군의 40%를 장악하였던 소련 유학파 장교세력은 삽시간에 일소되었다. 이후 북한은 단 한번도 해외에 군사 유학생을 보내지 않았다.
2017. 08 저작권자(c) 지식의 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