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지옥으로 만든 최악의 천재지변 ‘경신 대기근’

2017년 8월 10일   admin_pok 에디터

역대 최악의 대기근(1670~1671)

조선 18대 현종 재위 11년, 12년인 1670(경술년) ~1671년(신해년)에 벌어져 ‘경신 대기근’이라 부른다.

한국사 교과과정에서 제대로 언급되지 않아 잊힌 내용이지만, 차라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기가 더 나았다할 정도로 참혹했던 대기근이었다.

조선 역사 500년 동안 기근은 흔한 일이었지만 그 점을 고려하더라도 ‘경신 대기근’은 말 그대로 대재앙, 대참사였다.

당시 한반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자연재해는 하나도 빠짐없이 발생한, 경신 대기근의 내막은 아래와 같다.

1. 5월부터 대량 메뚜기때 상륙.

당시 영의정이 “나라의 존망이 걸려있다” 라고 까지 했으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2. 여덟번의 기우제

그러나 6월이 넘도록 비는 오지 않았다.

농작물이 다 말라죽고 파종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3. 마침내 마주한 비. 그러나…

하늘에서 내린 것은 다름아닌 우박.

초목이 다 병이들고 서리와 냉해로 그나마 있는 농장물까지 다 죽었다.

4. 7월 9일 마침내 비가 내렸다.

그 동안 못내린 비를 쏟아내는지 어마어마한 폭우 발생.

초가삼간 다 떠내려 갔고 전국적 산사태 발생.

가축과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겨우 심은 농작물은 다시 모두 썩어들어갔다.

5. 본격적으로 열린 지옥문

여름부터 가을까지 큰 태풍이 6차례나 한반도에 상륙.

조선팔도를 문자 그대로 ‘쑥대밭’을 만들었다.

6. 지진

지진이 거의 나지 않는 나라에서 크고 작은 지진이 수시로 발생.

백성부터 조정까지 모두 아비규환.

7. 설상가상, 전염병 발병

특히 신해년(1671년)엔 궁궐도 뚫려 사대부가 사망하고 종친들이 질병으로 죽는 사태까지 발생.

8. 끝나지 않은 재앙

7월 말 부터 구제역이 창괄하여 8월 한 달에 폐사한 소만 1만 6천마리가 넘어갔다.

당시 소는 농경의 상징이였으니 남아있는 땅떵어리에서도 수확하기가 거진 불가능인 상황. 나라가 마비되었다.

9. 대기근이 끝나기 까지

이 지옥같은 상황은 2년동안 반복되었다. 최종적으로는 조선인구 약 5분의 1인 100만명이 사망.

결국 경신 대기근은 마무리가 되었지만, 이런 대재앙의 원인은 비단 자연 재해 뿐만은 아니었다.

이는 오늘날 밝혀진 대기근 당시의 일화에서 물고 물리는 재앙의 다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8도 전체의 흉작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상황에서 사람이 아무리 이성의 동물이라지만 생존조차도 불가능한 벼랑 끝에 몰리면 천륜도, 인륜도 저버릴 수밖에 없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에 따라 전국에선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현재도 마찬가지일 정도의 비상식적인, 실로 유교사회에서는 있을수도 없는 패륜적인 사건들이 속속 보고되었다.

부모들이 아이를 도랑이나 강물에 던져버리고 가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아이를 그냥 나무둥치에 묶어놓고 가는건 그래도 마지막 양심은 남아있는 수준.

배식을 받기위해 길게 늘어선 줄에서 기다리다가 남편은 결국 쓰러져 죽었는데 아내는 그 옆에 남아있는 죽을 모조리 긁어먹은 뒤에야 곡을 했다.

어머니를 업고 다니며 구걸하던 아들이 어느 순간 어머니를 버리고 가버렸는데, 어머니는 오랫동안 아들을 기다려도 오지 않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굶주림 앞에서는 가족이고 인륜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우려하던 서로 잡아먹는 상황, 즉 인육을 먹는 식인 사고까지도 보고되었다. 충청도 깊은 산골에서 한 어머니가 5살 된 딸과 3살 된 아들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었다는 것이었다.

원래 같으면 나라 전체가 완전히 뒤집힐 만한 엄청난 사건이었으나, 이때는 워낙 흔한 일인지라 별 반응도 없었다.

오히려 승정원에서는 “굶주림이 절박했고 진휼이 허술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할 정도였다

심지어 경신대기근 기간동안 공주, 재상급 인사들마저 죽어나갔다.

이러한 대기근을 겪은 후, 당연하게도 조선 내부에는 체제에 대한 불만 세력이 많이 생겼다. 숙종 때는 흔히 알려진 장길산이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비기, 도참, 미륵 신앙 등이 흥성했다. 이에 조선 정부도 호패법을 강화하고 오가작통제를 본격적으로 행정에 활용하면서 유민의 통제에 나서게 된다.

또한 경신대기근은 대동법에 대한 지지여론을 높여주기도 하는 아이러니를 낳기도 했다. 대기근에서 그나마 백성들이 살아남은 건, 대동법으로 부담이 완화되었기 때문이란 인식이 지방 사림들에게서 퍼지면서 대동법이 더더욱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한편 당시 조선의 기근에 대해 ‘조선의 구휼 체제가 열등해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으나, 전술했듯이 조선의 구휼책은 충분히 체계적이고 전국적으로 시행된 편이었다.

물론 유교적 검약 사상에 의거해 세율이 낮은 탓에 비축된 재정이 적었고 그로 인해 구휼 재정이 금방 바닥났다는 것은 문제라고 볼 수 있긴 하지만, 최소한 당시 조정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텐메이 대기근 같은 에도시대 4대 기근 당시 막부의 구휼책이나 잉글랜드의 자유방임주의에 의거해 구휼 자체를 놓아버린 아일랜드 대기근에 비교해도 후진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2017. 08 저작권자(c) 지식의 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