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국가 ‘발해’에 ‘매춘’이 없었던 이유

2017년 August 11일   admin_pok 에디터

인간의 역사 상 가장 오래된 직업중 하나가 매춘이다.

이것은 남성 중심의 역사가 그만큼이나 오래 됐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항상 매춘은 존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먼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매춘의 역사에서도 예외는 있다.

바로 발해의 경우가 그렇다.

이는 발해에서 ‘여권’이 상당히 강했기 때문이다.

발해는 일부일처제가 일찍이 확립되어, 남자들은 인근의 신라나 중국의 귀족과 일반인들도 많이 거느렸던 첩을 둘 수 없었다.

남송시대의 문헌인 <송막기문>을 보면 첩을 두었다 하더라도, 남편이 외출하면 부인들이 공모해 그 첩을 독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부인들은 투기가 심하다. 대체로 다른 성씨들과 서로 10자매라는 (의자매) 관계를 맺어 번갈아 남편들을 감시하며 첩을 두지 못하게 한다. 남편이 밖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독살을 모의하여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인다. 한 남편이 바람을 폈는데 그 아내가 깨닫지 못하면 아홉 자매가 떼지어 가서 비난한다. 이처럼 다투어 투기하는 것을 서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므로 거란, 여진 등 여러 나라에는 모두 창기(娼妓)가 있으며 양인 남자들은 첩과 시비를 두지만, 발해에만 없다.
<송막기문 발해국 中>

일부 일처제가 확고한 까닭인지 발해의 무덤에는 ‘부부합장묘’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첩을 둘 수 없었던 발해의 남자들은 집이 아닌 밖에 나가서도 딴 짓을 할 수 없었다.

신라나 중국, 거란이나 여진족에도 모두 존재했던 홍등가, 창녀 등이 전무했다.

게다가 발해가 계승했다는 고구려에서도 창녀의 일종인 ‘유녀’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중국 북동부 지방에는 ‘홍라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홍라녀’라는 발해 여인이 장군이 되어 거란과의 싸움에 나가 이긴뒤 암편을 구해 돌아왔다는 전설이다.

집안에서만 강한게 아닌 실제 전투를 수행할 정도로 씩씩한 발해의 여성이었다.

그래서인지 발해에서는 절을 할때도 남자는 무릎을 꿇고 하는데 비해 여자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이 정도면 우리 역사에서 여권이 가장 강력했던 나라로 발해를 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발해는 미지의 국가다.

역사적 사료가 많지 않은 발해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이뤄지고 있지만 다르게 보면 그 만큼 흥미로운 나라가 아닌가 싶다.

그로 인해 ‘발해’를 모티브로 삼은 영화나 드라마 등 다양한 예술 작품들이 만들어지는 편이다.

실제 영화 ‘무영검’에 모티브가 되어 잘 알려진 ‘홍라녀 전설’중 한 일화를 소개한다.

무단장시(牡丹江市)의 동경성(東京城)은 옛날에는 발해국의 도읍이었다. 어느 해 음력 8월 가을 밤에 늙은 왕 대막불(大莫弗)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오풍루(五風樓)에서 달빛을 감상하고 있었다. 갑자기 대내상(大內相)이 서남쪽 하늘을 손으로 가리키며 왕에게 아뢰었다.

“대왕 폐하, 빨리 저쪽을 보시옵소서!”

왕이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서남쪽 하늘을 절반이나 붉게 물들이며 홍라산이 펄럭이며 내려오고 있었다.

대내상은 말했다.

“대왕 폐하, 저것은 홍라산성(紅羅傘星)이 속세로 내려와 징포후(鏡泊湖)에 떨어지는 것이옵니다.”

늙은 왕은 몹시 기뻐서 즉시 말을 타고 밤새 달려 징포후에 이르렀다. 호수에 비친 하늘도 붉고 산도 붉고 나무도 붉고 물도 붉었다. 호수 표면에는 한 송이 연꽃이 떠 있는데 그 황금 날개에 섬광이 번쩍였으며 그 윗면에는 위에 하얀 짧은 저고리를 입고 아래에 복숭아빛 붉은 치마를 입은 아가씨가 서 있는데 그 곁에는 또 눈처럼 하얀 천리마가 있었다.

늙은 왕이 곧 물었다.

“처녀야,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홍라녀(紅羅女)라고 하옵니다.”

홍라녀는 왕의 앞으로 나아가 엎드려 절하였다. 늙은 왕이 바라보니 처녀는 용모가 빼어났다.

왕은 몹시 기뻤다. 그래서 곧 말했다.

“홍라녀야, 너는 내 아들의 아내가 되도록 나와 함께 궁궐로 돌아가자. 발해국의 다스림이 인의(仁義)의 나라를 이루도록 도와 다오.”

홍라녀는 왕의 말을 따랐다. 홍라녀는 아름답게 자랐고 문무(文武)를 겸전하고 글을 알고 이치에 통달하였다. 그녀와 왕의 막내 아들 대홀한(大忽汗)이 혼인을 마친 후, 매일 매일 남편과 더불어 무예를 단련하고 시문(詩文)을 배우며 인정과 세상 이치를 담론하였다. 어느 날 늙은 왕이 그녀에게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인지를 물었다.

홍라녀는 다음과 같이 4마디로 대답했다.

“나라를 배반하는 자는 죽여 마땅하고, 백성을 속이는 자도 죽여 마땅하고, 남의 재물을 훔치는 자도 죽여 마땅하며, 남의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는 자도 죽여 마땅하옵니다.”

늙은 왕은 연방 고개를 끄덕이더니 법률로 만들어 전국에 공포하였다. 이로부터 발해국은 문명의 나라가 되고 평화가 이루어졌다. 발해국은 산도 물도 기름졌다. 사람이 부지런히 일하면 땅은 그 공을 보답하는 좋은 지역이었다. 징포후의 붕어와 홀한하(忽汗河)의 진주는 모두 이름난 상등품이었다. 당시 발해국은 당나라(唐)의 제후국으로서 해마다 사신을 당나라 조정에 보내 공물을 바쳤다. 가는 길이 서단국(西丹國)(거란)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우호를 나타내기 위해서 해마다 서단국에도 약간의 예물을 가져갔다. 그러나 서단국은 탐욕스러워서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속으로는 발해국을 집어 삼키려 생각하였다. 어느 해에 뜻밖에 발해국에서 당나라에 조공하러 보낸 사신을 서단국이 붙잡아서 대홀한이 교섭하러 갔는데 그마저 붙잡고 다시 발해국의 늙은 왕에게 편지를 보내어 나라땅을 내놓으라 하고 그러지 않으면 곧 대홀한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이에 늙은 왕은 다급해서 큰 아들 대홀리(大忽里)에게 봉한 편지를 3번이나 보냈다. 대홀리는 당시에 양성남부주(養城南部州)에 머물러 도독(都督)을 맡고 있었는데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대홀한을 구하러 갔으나 곧 싸움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왕이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는데 홍라녀가 용감히 나서서 아뢰었다.

“소녀가 필마단기로 가겠사오니 폐하께서는 마음을 놓으시옵소서.”

말을 마치자 자신의 백룡마(白龍馬)를 타고 낮에는 천리를 밤에는 팔백리를 달려 서단국의 도읍에 이르렀다. 서단의 왕이 홍라녀가 혼자 온 것을 알고 방심하여 겁도 없이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발해국 공주가 아니냐? 어째서 끼어드느냐?”

홍라녀가 말했다.

“당신은 우리나라의 땅을 달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나는 나라 땅을 주는 대신에 대홀한을 데려가려고 왔소이다.”

서단 왕은 무척 기뻐서 곧 사람을 보내어 대홀한을 데려 오게 하였다. 그 때 갑자기 홍라녀가 대홀한을 잡아 당겨서 말 위에 뛰어 오르더니 채찍질을 하며 보검을 꺼내 들고 밖으로 달아났다. 백룡마는 쏜 살 같이 달려 성 문까지 돌진하였다. 문 앞에는 서단의 병사들이 가득했다. 홍라녀는 칼을 휘둘러 마치 수박을 쪼개듯이 적을 베며 성문으로 돌진하였다. 큰 자물쇠가 눈에 띄었다. 홍라녀는 보검을 들고 “얏” 하는 소리를 지르며 성문을 쪼개고 한 줄기 밝은 빛살처럼 발해국으로 돌아왔다.

홍라녀가 대홀한을 구하여 돌아오니 늙은 왕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즐거워하였다. 그렇게 즐거운 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며칠 뒤 대홀리가 편지를 보내어 아내가 죽었다고 알렸다. 대홀한이 조문하러 가려고 하니 홍라녀가 말하였다.

“형님은 일찌기 나라를 찬탈할 마음이 있었으니, 당신이 간다면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없어요.”

대홀한이 말했다.

“형님은 주색(酒色)에 빠진 사람이니 당신이 가면 나도 마음을 놓을 수 없소.”

홍라녀가 말했다.

“도읍은 하루도 비울 수 없으니 내가 가겠습니다. 만일 무슨 사건이 생기면 나는 백룡마를 보내 소식을 전할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말과 사람들을 데리고 달려갔다. 영주성(郢州城)에 이르러 홍라녀는 사흘 동안 조문하고 막 돌아오려는데 대홀리가 염치없게도 그녀를 잡고 놓아 주지를 않았다. 홍라녀는 시아주버니의 음흉한 생각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남의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는 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지만, 며칠이고 오래 같이 살 듯이 거짓으로 대답하고 숙소에 숨겨 두었던 백룡마의 갈기 속에 글을 적은 뒤 풀어서 돌아가게 하였다.

저녁에 대홀리가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홍라녀의 침실에 들어와 억지로 범하려 하니, 홍라녀가 노하여 보검을 빼어 들고 대홀리를 향해 휘둘렀다. 대홀리는 패덕한 자로서 귀를 베이자 귀신이나 이리처럼 부르짖으며 날뛰었다. 홍라녀는 수행원들을 데리고 밤을 새워 달려서 돌아갔다.

멀리 가지 못해서 한 줄기 큰 강이 길을 막았다. 대홀리의 병마가 등불을 들고 추격해 오는 모습이 보였다. 홍라녀가 보검을 꺼내어 강물 위를 베니, 강물이 둘로 나뉘고 그 속에서 다리 같은 육지가 드러나 홍라녀 일행이 겨우 그 강을 건넜다. 강 저쪽에서 대홀리가 추격하여 강가에 이르렀다. 강물은 다시 불어났다. 지금까지도 양현성(養縣城) 서쪽에 칼로 쪼갠 강이 있다. 홍라녀가 칼로 쪼개고 강을 건너자 대홀한이 한 떼의 인마를 거느리고 마중하였다. 서로가 이별로 인한 회포를 풀 새도 없이 대홀리가 이끄는 큰 무리의 인마가 바짝 추격해 왔다. 홍라녀는 말을 몰아 칼을 휘두르며 맞아 싸웠다. 홍라녀는 한 칼에 대홀리의 오른쪽 귀를 베었다. 대홀리는 두 귀가 모두 베여 낭패하여 달아났다. 홍라녀와 대홀한은 병마를 이끌고 돌아왔다.

수많은 백성이 마중 나와 말 앞에 무릎을 꿇고서 서단 왕이 빈 틈을 타서 침략하여 도읍인 홀한성을 점령하였고 늙은 왕은 백성들을 데리고 징포후의 성색입자(城墙砬子)로 후퇴하였음을 알렸다. 홍라녀와 대홀한은 병마를 이끌고 단숨에 도읍으로 진격하였다. 서단 왕이 성색입자를 포위 공격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홍라녀는 대홀한으로 하여금 도읍을 지키게 한 뒤 자신은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늙은 왕을 구하러 갔다. 성색입자는 3면이 호수에 향하고 1면이 산으로 싸였다. 서단 병사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발해국의 왕이 산 위에서 곤하여 죽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생각을 이루지 못하고 홍라녀가 병마를 이끌고 공격하니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다투어 달아났다. 홍라녀가 숨쉴 틈 없이 적병을 추격하다가 산 아래에서 갑자기 한 떼의 인마와 마주쳤는데 그 속에 대홀리가 있었다.

“홍라녀야, 나와 혼인하자. 그러지 않으면 나는 서단 왕과 합세하여 너를 죽이겠다!”

이 때에 서단 왕이 뒤쪽에서 공격해 들어왔다. 위기일발의 시점에 홍라녀가 보검을 들어 호수 한 쪽을 가리키자 호수가 마치 무너진 제방처럼 대홀리의 병마를 덮쳐 모두 익사케 하였다. 또 몸을 돌려 단칼에 서단 왕을 두 동강으로 베었다. 홍라녀가 달아나는 서단의 병사들을 막 추격하려는데 화살 한 대가 날아와 가슴 한복판에 꽂혔다. 홍라녀는 몸을 뒤집으며 말에서 떨어져 숨을 거두었다.

늙은 왕은 쇠로 관(棺)을 만들어 홍라녀를 묻고 징포후 폭포 뒤편에 홍라각(紅羅閣)을 짓고 홍라녀의 신상을 모셨다. 해마다 이 날 추석에는 모두 다 향을 피우며 공양한다. 백성들은 태평한 세월을 보냈지만 홍라녀를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참조 –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