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째 희생자 집계조차 안 되는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6.25 전쟁 당시.

1950년 7월 26일 부터 1950년 7월 29일 동안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

1999년 AP통신 기사를 통해 한국과 미국에 공론화가 되었으며 2000년 미국과 한국 두 나라는 별개의 조사단을 편성하여 실태파악에 나섰다. 2001년 1월 12일 한, 미 양국은 조사결과를 동시에 발표하였고 조사단 공식적으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 이라 결론지었다. 생존자들은 사망, 부상 또는 실종 인원을 총 248명이라 신고하였으나 조사단은 이보다는 적은 숫자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정확한 피해 인원을 추산할 수 없는,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다.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진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

■왜 민간인들을 학살했을까?

사건 당시 남측으로 내려오는 피난민들 중 민간인으로 가장한 북한 육군 병력이 숨어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피난민 통제에 고심하던 미 육군 제8군은 사건 전날인 25일 저녁 주한 미대사관과 한국 정부와 함께 피난민 통제 대책회의를 실시한다.

이 회의에서 관계자들은 피난민을 “구호의 대상이 아닌 군사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무초 당시 주한미대사는 회의 결과에 대하여 “차후 미국내 논란이 걱정된다.”는 서한을 작성, 보고하였다.

다음날인 26일 오전 10시, 미 육군 제8군사령부는 전 부대에 피난민이 미군방어선을 넘지 못하게 할 것을 명령한다.

사령부의 명령을 하달받은 예하 사단장들은 좀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예하부대에 명령을 하달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노근리 피해자들에게 공격을 가한 미 육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2대대의 전투관련 문서 중에서는 이러한 명령이 포함된 문서가 발견되지 않아, 미 조사단은 해당부대에는 피난민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적이 없고, 그러므로 미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대신 미 조사단은 공동발표문을 통해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의 나이가 어리고, 훈련 및 장비가 부족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서로 엇나가는 주장, 공중폭격

한.미 조사단은 당시 노근리 주변에 몇 차례의 공군 작전이 수행된 사실은 있으나 피난민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졌는지는 해당 작전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반해 피해자 측은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간 후, 또 다른 비행기가 나타나 폭격을 가했다.”, ‘미군이 소지품 검사 이후 무전을 날렸고 이후 폭격이 시작됐다.”고 일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조사, 발표, 그리고 그후


2004년 2월 9일 ‘노근리사건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여 같은 해 3월 5일 노근리 사건 특별법이 공포된다.

이후 피해자 가족들은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현재까지 계속 중이다.

한편 공식조사발표 이후에도 미 참전 용사들의 ‘상부 명령이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되자 미 국방부는 ‘명령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있었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 고 밝혔고 이후 AP통신을 통해 증언을 했던 참전용사들은 증언내용을 번복했다.

이후 증언자들의 사망과 연락두절, 증언거부 등으로 미군측 증언은 더 이상 나오고 있지 않다.

아직도 노근리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서송원천 위로는 경부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영동역과 황간역사이에 위치한 사건 현장인 개근철교(쌍굴)에는 여전히 총탄자국이 수백 개 남아 있다.

철교 옆의 강변으로는 노근리 역사공원과 노근리 평화기념관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