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만큼 능력이 뛰어났던 천재성이 다분했던 왕

  						  
 								 

정조(正祖)조선의 22대 국왕(1752년 ~ 1800년. 재위는 1776년 ~ 1800년)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렬성인장효대왕(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고 본래 묘호는 “정종(正宗)”이었으나 1899년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의 4대조를 추존할 때 고종의 증조부가 된다는 이유로 정조로 변경되었으며,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다.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1],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정조 임금의 깨알같은 에피소드.

 

 

1.
각종 기록에 보면 신하들에게 “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니들이 뭘 안다고 이러냐”며 신하들을 까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실제로 정조는 “경들에게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며 경연(왕이 신하들과 토론하며 학문을 배우고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을 폐지하며, 직접 자신이 중하급 관리를 교육해서 발굴하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한다. 또한 실록에 보면 신하들에게 “공부좀 하시오”같은 엄마같은 멘트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훈민정음 창제시절의 세종 정도만이 저런 부문으로 대등하게 평가받을 수 있을 듯 하다.

저런 점만을 보면 정조가 공부벌레로만 보이지만, 찾아보면 대단한 먼치킨이다. 세손시절부터 여러 암살기도에 시달린 탓에 스스로 무예를 익혀서 뛰어난 무예실력을 갖추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도 무술에 조예가 깊었다.

활 솜씨도 대단히 훌륭해서 글자 그대로 ‘백발백중’. 화살 50발을 쏘면 48발, 49발씩 맞추고 나머지 한 발은 일부러 명중시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신하들 기죽을까봐.

근데 또 자상한것만은 아니어서 성질이 불같고 쪼잔한데다가 궁궐에서 계속 자라온 탓에 참을성이 별로 없었다. 얼마전 공개된 심환지와의 편지에서 정조의 불같고 쪼잔한 성격이 드러났다.

이 쪼잔하고 불같은 성격이 엄친아적인 능력과 결합되면 말빨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실제로 조선조 역대 국왕 중 말싸움은 극강급. 실제로 정조와 논쟁 한번 벌였다가 유체이탈을 제대로 경험한 조정 중신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즉위 직후 치뤄진 신하들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빽으로 급제한 신하들의 답안지를 전국 관아에 뿌려서 개망신을 시켜버렸다.

역시 말빨 1인자… 이때가 정조 나이 무려 24세.나중에 나이 들고서는 좀 더 쪼잔해져서 자기 정책을 공개적으로 깐 어느 선비를 대사헌에 임명시키면서 대놓고 ‘니가 그 임무를 할 수 있겠냐’ 라고 조롱했다. 이런 불같은 면모는 할아버지 영조와 증조부 숙종에게서 잘(?) 물려받은 듯.

게다가 시서화에도 능했으며 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본인이 직접 자신의 병에 처방을 했을 정도였다. 이쯤 되면 정조가 과연 우리와 같은 인간인가 의심스러운 대목.

그러나 정작 정조실록을 찾아보면 서술된 정조의 증세와 처방은 전혀 상관이 없거나, 오히려 병을 악화시키는 쪽인 경우도 있다. 어설프게 아는 것은, 특히 의학의 경우, 위험하다는 걸 보여주는 일례일지도.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이 처방을 했는데, 그것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자신의 무예실력과 장용영의 특수성이 있었는지 몰라도 무예도보통지라는 종합 무예 서적을 발간하기도 한다. 이 책은 요즘도 조선시대 군인의 복식과 무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책을 바탕으로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이나 치러지는 행사도 많다.

 

 

2.
어릴 적 스트레스로 어딘가 비뚤어져서(?) 술과 담배를 병적(?)으로 즐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술의 경우 자주는 아니고 어쩌다 한번씩 먹었는데, 이 어쩌다 먹는 술이 어느 정도였냐면, 술에 취해서 움직이지 못할정도였다고.

또한 술버릇은 다른 사람 참 피곤하게 만드는 술버릇 중 하나인 ‘다른 사람에게 어거지로 술 권하기’였다고 한다. 그냥 직장 선배가 그래도 피하기 힘든데, 하물며 왕이. 게다가 담배 예찬론자여서 담배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거나 소화에 좋고 추위와 더위를 쫓아낸다고 극찬한적이 있다.

문제는 그의 아들 순조는 지독한 혐연주의자였다는거…”

왕으로서는 유일무이하게 안경을 애용하기도 했다.그리고 선비들도 강해져야 한다는 명목으로 강제로 정약용 같은 문약한 선비들을 하루 종일 손이 부러져라 활쏘기를 시킬 정도로 가혹했던 인물.

정약용에게는 이외에도 술을 필통에 부어 마시라고 종용했을 정도다. 이 시절 필통은 붓 몇자루가 들어가는, 현재 기준으로는 바가지만한 크기였다(…)”

이순신을 진심으로 높이 평가했는지, 정조실록이나 정조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를 보면 이순신에 대해 정말 침이 마르도록 찬양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 나라에 진정으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은 이충무공밖에 없다.”라든지, “그가 만약 고대 중국에 태어났으면 제갈량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어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발간케 하는 등 재위 기간 내내 이순신 기념, 추모에 신경을 많이 쓰기도 했다.

2009년 2월 발견된 심환지와 교환한 서신첩인 ‘정조어찰첩’을 보면 ‘학자군주’답지않게 왕의 표현이라 볼 수 없는 표현들을 많이 쓰고 있다.

특히 자유자재로 욕설과 막말을 구사하는 모습 때문에 화제가 되었는데, 예를 들면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사람 꼴도 못 갖춘 새퀴랑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병진이 감히 그 주둥아리를 놀린다.”라는 표현이라든지, “호로자식”이라든지. 어전 회의 중에 신하들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했다거나 맘에 안 드는 구석이 보이면 바로 *새끼, **새끼 등의 욕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다만 정조가 성군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이유는 자기 기분이 틀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신하들의 유배 등으로 이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

어떤 편지에는 ‘아놔. 내가 새벽 세시까지 잠 못자고 이러고 있다.’란 말 뒤에 ‘가가(呵呵)’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건 웃음소리 ‘껄껄’을 뜻한다. 요즘으로 치면 “ㅋㅋㅋ”나 다를 바 없는 표현. 이런 걸 보면 키보드워리어의 지존, 초성체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을지도. 아니 무슨 조선 왕실 혈통에 키배의 재능이 흐르는 것도 아닐 테고.

사실 이 기록이 남은 것은 후대인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야 사료료서의 가치가 높기 때문에 다행인 일이지만 심환지와 정조 사이의 관계만 놓고 본다면 심히 잘못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임금이 자신의 사람이라 믿는 신하에게 이런 편지를 썼을 때 신하는 편지를 다 읽은 후 태워 버리는 게 예의였다.

한 마디로 심환지가 혹시 모를 상황에 보험을 들기 위해 남긴 편지, 혹은 정조의 약점으로 잡으려 남긴 편지가 그대로 내려와 현대에 발견 된 것. 그러나 사실 군신 관계라는 게 항상 불안정한 정치적 관계이고, 특히 정조처럼 왕이 다혈질일 때에는 신하 입장에서 불안감이 생기고 혹시 모를 일에 대해 보험을 들어 놓는 일을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

애초에 다른 신하들이라고 편지를 태웠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를 보면 굉장히 온화해 보이지만, 이는 후대에 김기창 화백이 표준 영정으로 그린 것이다. 실제로 순조의 회상에 의해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 상당히 억세고 굳건한 인물로 보인다.그에 대한 묘사로 정조는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능은 경기도 화성시 태안면에 위치한 건릉(健陵)이다. 원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어서도 모시려고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 동쪽에 자신의 능터를 잡았고 거기에 묻혔다.

그런데 풍수학적으로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이 나와서 이장 논의가 나던 차에 중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오늘날의 위치인 융릉 서쪽으로 이장, 효의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사도세자의 능과 묶어서 ‘융건릉’이라고 부른다.

한국사의 인기 있는 임금 중 한 명으로, 그 인기를 반영하듯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 사극 속에서는 주로 ‘개혁군주’라는 평가에 초점을 맞춰서 등장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인생이 워낙 드라마틱했던 군주인지라 주인공은 아니라도 드라마의 비중 있는 역할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 외에도 소설이나 연극 등 여러 창작물에도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3.
정조가 패관문학(즉 오늘날의 소설)을 무척 싫어하여, 당시 소설 중독(…)에 빠진 관료를 징계한 사례가 있고, 김조순도 숙직 중 연애소설을 읽다가 걸려서 청나라 사신단에 포함되 가는 길에 반성문을 써야 했다.

유교 문화권에서 글이라는 것이 갖는 상징성을 생각해 보면… 새로운 문체를 구사하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이옥의 경우, 문체 교정 안 하면 평생과거금지 라는 선비로서는 치명적인 벌을 내리기까지 한다.

물론 그렇게 징계한 관료들이 자기 뜻에 맞게 알아서 기면반성하면 나중에 중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김조순이 반성문 잘 서서 정조의 용서를 받고 정조의 사돈으로 까지 정해진 게 그 예.

실제로 정조는 문체가 난잡해진 원흉으로 지목한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에게도, 옛 고문 문체로 ‘반성문’ 쓰면 크게 중용하겠다는 러브콜뜻을 전한다.

당연히 박지원 주위 문인들은 기뻐하며 그들이 나서서 글 쓸 자료를 모아주겠다고 했으나, 박지원은 ‘나같은 못난 놈에게 전하가 관심 보이시다니 더 이상 전하의 눈을 썩게 하는 무례를 저지를 수 없어염’이라는 반응으로 반성문 작성조차 회피하는 기염을 토한다(…).

 

 

4.
술의 경우 자주는 아니고 어쩌다 한번씩 먹었는데, 이 어쩌다 먹는 술이 어느 정도였냐면, 술에 취해서 움직이지 못할정도였다고. 또한 술버릇은 다른 사람 참 피곤하게 만드는 술버릇 중 하나인 ‘다른 사람에게 어거지로 술 권하기’였다고 한다.

그냥 직장 선배가 그래도 피하기 힘든데, 하물며 왕이. 게다가 담배 예찬론자여서 담배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거나 소화에 좋고 추위와 더위를 쫓아낸다고 극찬한적이 있다. 문제는 그의 아들 순조는 지독한 혐연주의자였다는거…

정약용에게는 필통에 술을 부어 마시기를 강요하였는데, 이 시절 필통은 붓 몇자루가 들어가는, 현재 기준으로는 바가지만한 크기였다(…)

 

그리고.

 

“이덕무, 박제가 등은 문장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들의 처지가 남과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능력을 드러내도록 돕고자 한 것이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서얼 출신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하고, 숙종 이후 집권세력에서 완전히 밀려났던 남인 계열의 정약용, 채제공 등을 등용하였다.

 

출신을 불문하고 수많은 인재들을 등용했으며, 백발백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활쏨씨를 지닌 뛰어난 ‘무’까지 겸비했던 조선 22대 왕 정조.

 

일각에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찬물을 끼얹은 탓에 빛을 발하진 못했지만, 정조대왕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도 우리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평가’할 정도로 수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