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카바와 청바지를입고 흰색 하이바를 쓴 전의경, 직원 기동대원들.
제1공화국 시절 자유당에 의해 원외에서 조직된 정치깡패 집단이 시초였으나 이후 사라졌다가 군사정권 시대 경찰 시위 진압 부대의 별칭이 되었다.
군사정권시절 이들은 당시 독재시대를 상징하는 권위의 상징이자 시민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존재였다.
1. 백골단의 유래
‘백골단’이라는 명칭 자체의 유래는 백골단의 상징과도 같은 흰 헬멧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초창기엔 붉은 헷멧이 보급되었으나, 삼청교육대 죄수들이 사면을 조건으로 시위 진압 활동이라는 설이 돌자, 깨끗함을 의미하는 순백색 헬멧으로 교체 지급하였고 이에 얻은 별명이 백골단이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론 ‘8,90년대 학내 시위자 진압을 수행한 사복경찰’을 지칭한다.
정확한 시초는 형기대, 즉 ‘형사 기동대’로 추정되며, 사복을 입고 시위 진압보다 시위자 검거를 위해 활동하던 이들로 추정된다.
이러한 형기대가 발전하여 직원 중심의 사복 경찰이 의경 중대가 되고, 그사이 이들의 진압 능력이 매우 뛰어났음이 증명되며 유명해진 것이다.
백골단 전에는 경찰력은 관내를 중심으로 개편되어 있어 타 관할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여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각 관내에서 백골단과 같은 시위 진압 특수 병력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2. 백골단의 장구류
백골단은 청카바(청자켓 + 청바지)의 사복 차림에 머리엔 흰색 헬멧을 착용하였으며, 가죽 장갑을 끼고 워커 대신 운동화를 착용했다.
청카바 대신 흑카바 (흑청바지, 자켓&남방), 흰색 대신 청색, 누런색 헬멧을 착용하기도 하였으며, 운동화의 경우 초기엔 흑색 운동화가, 후에는 백색 운동화가 보급되었다.
초기에는 정부에서 무전기 하나에 헬멧만 지급해줄 정도록 열약한 지원이였으나, 이들의 진압 능력이 인증 받으면서 점차 지원이 늘어났다.
무장으로는 자위 및 공격용으로 깨방 혹은 버클러로 불리는 작은 방패를 보급받았고, 공격용 무기의 경우 시위 진압 경험이 쌓이며 곤봉 중 장봉, 단봉보다 중봉이 ‘진압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사용 되었다.
3. 백골단의 진압 능력
백골단이란 이름이 악명이 높았던 이유가 바로 그들의 잔인한 ‘진압 능력’ 때문이었다.
장구류의 경우, 빠른 기동성과 효율을 위해 청카바 및 운동화를 보급하였으며 이명박 정부 당시 피해가 최소화되는 단봉만 지급한것과 달리 백골단은 인명 살상 및 진압에 최적화된 중봉 으로 무장했다.
경우에 따라 내부에 철심 등을 박은 장봉이나 철근이 든 PVC파이프 등 자체 제작 무기까지 사용하기도 했다.
차출된 인원은 ▲무술 유단자 ▲특전사 출신 ▲키180 이상 ▲100m 11초대 주파 등 체력적 우수자들 위주로 엄격하게 선발한 인원이며 이들의 훈련 또한 ▲오전8시~저녁8시 방동명 착용 구보(평상훈련) ▲일반적인 무술과 다른 방패술과 봉술 ▲시위시 진압 실패하거나 뚫리면 이후 최소 한달간 죽음을 각오한 훈련 ▲만일의 경우 시위대 효과적 진압을 위한 수기타격법 훈련 등으로 엄청난 훈련량과 체력을 보였다.
실 사례에서는 상황 발생시 서울역에서 명동역까지(약 2.4km) 방독면을 쓴채 구보, 민가 대문을 부수고 들어가 도망간 학생들 끌어내기, 출발하려는 지하철 창문을 다 깨부수고 진입하여 전원 체포, 교내 진입하여 시위 주도 학생을 체포하는 등 무시무시하고 잔인한 진압 능력을 보였다.
때문에 폭력 시위 사태가 벌어지면 백골단처럼 보이기 위해 일반 경찰들까지 사복을 입혀 배치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진압 방식은 자율성 보다는 군대식 상명하복에 의한 체계적 진압이 주를 이뤘다.
이는 구성원 자체가 특전사, 해병대 무술 특에디터 특채 위주로 선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백골단의 경우, 2년의 기동대 근무 이후, 업무의 특성을 고려한 특별 수당과 함께 체포자 수에 비례해서 보통 100m 간격으로 표지를 설정하거나 큰 건물들을 지표로 삼아서 체계적인 몰이를 통해 진압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이들의 목적 자체가 시위시 대치가 아닌 시위 주동자 체포 및 전투를 통한 시위대 와해였다.
큰 방패를 든 전경들이 시위대와 대치하면서 흐름을 저지하고있는 사이 백골단이 투입되어 시위대를 돌파하며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이다.
백골단은 여러모로 악명을 떨쳤는데 특히 시위진압 중 1991년 4월 당시 명지대생이던 강경대를 이들이 진압하면서 철근이 든 죽도와 쇠파이프로 때려죽이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더욱 악명을 떨쳤다. 강경대는 연락조로 가장 늦게 학교담을 넘어서 도주하던 중(사실상 시위대 본대에서 낙오된 상황이었다) 백골단 5~7명에게 끌어내려져 철근이 들어간 죽도와 쇠파이프로 두부를 집중가격당하고 길거리에 버려졌으며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곧 사망하였다.
강경대 사망사건에 항의하는 시위 와중에 5월 성균관대생 김귀정 또한 경찰에게 집단구타 당해 사망한다. 그래서 성균관대 명륜캠퍼스엔 “김귀정 생활도서관” 이라는 동아리가 지금까지 내려온다.
백골단에 의해서 사람이 죽는 일도 존재하기에 중경상을 입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 현 법외노조인 전교조 주동하에 소위 ‘참교육 운동’을 전후해 발생한 ‘고등학생운동’ 활동을 했던 고등학교 시위대도 있었는데 백골단에 의해서 진압된 고등학생 시위자의 어지간한 뼈마디가 모두 골절된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1991년 5월 7일에 백골단들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의 빈소로 쳐들어가 영안실 벽을 깨부수고 박창수의 시신을 탈취하기도 했다.
일단 시위 현장 뒷편으로 봉고차가 여러 대 이동하면서 10m 간격으로 백골단을 내려놓는다. 배치되는 인원은 시위하는 사람들의 수에 따라 결정된다. 이렇게 도로에 올라선 백골단은 우렁찬 기압을 지르며 시위대의 뒷편으로 몰아 닥친다. 앞에서 전경이 쏘아되는 최루탄을 피하던 시위대는 도망갈 퇴로를 차단 당하면 당연히 우왕 좌왕하다 흩어진다. 이 흩어진 시위대를 붙잡아 죽지 않을 정도로 때린 뒤 닭장차에 태우는 임무가 바로 이 백골단의 임무였다.
남자, 그냥 두들겨 팬다. 남자는 어디가 부러저도 되기 때문에 살려달라고 빌어도, 발을 붙잡고 애원을 해도 그냥 팬다. 입에 거품을 물 정도가 되면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간다. 여자, 똑 같다. 백골단은 남녀의 구분을 못한다. 걸리면 똑 같이 잎에 거품을 물어야 한다. 나이드신 분, 똑 같다. 백골단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못한다. 백골단이라는 명칭은 초기 이들이 걸친 옷에서 나왔지만 사람을 뼈도 못추릴 정도로 두들겨 패기 때문에 나온 명칭이기도 하다.
(당시 체포당한 숭실대학생이 인터넷에 올린 회고 中)
현재 백골단은 비인권적인 군사정권의 잔재라는 비난에 의해 전경과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백골단의 출동 모습
● 광주광역시 조선대학교 정문 앞 백골단에 저항하는 학생 시위대
● 잔인한 백골단의 모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