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만큼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기근’.
조선 18대 현종 때 2년에 걸쳐 발생한 ‘경신대기근’이 있었는데, 이 때의 대기근은 그야말로 대재앙, 대참사라는 단어도 부족할 정도로 끔찍했던 수준이었다.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 《현종개수실록 22권》 1670년 5월 2일, 2번째 기사에 기록된 왕의 자책
현종 때 대참사가 일어난 ‘경신대기근’에 이어 숙종 때 ‘을병대기근(을해-병자대기근)’이 발생한다.
을병대기근도 경신대기근 못지 않게 엄청난 사망자를 발생시켰는데..
현종 때도 그렇고 숙종 때도 그렇고, 최악의 ‘대기근’으로 유교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잡은 조선사회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패륜적인 사건’들도 발생하기도 한다.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치계하였다.
“선산부(善山府)의 한 여인은 그의 여남은 살 된 어린 아들이 이웃집에서 도둑질하였다 하여 물에 빠뜨려 죽이고, 또 한 여인은 서너 살 된 아이를 안고 가다가 갑자기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갔으며, 금산군(金山郡)에서는 굶주린 백성 한 사람이 죽을 먹이는 곳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그의 아내는 옆에 있다가 먹던 죽을 다 먹고 나서야 곡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부여받은 인간의 윤리가 완전히 끊겼으니,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현종실록 현종 12년 4월 5일 4번째 기사>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사람들이 뱀처럼 악독해져 여기저기서 도적들이 일어나니 백성들로 하여금 차마 못할 짓을 하게 만들고 있다.”(숙종23.4.22)
“백성들의 곤궁함과 고통이 오늘과 같은 때가 없었다. 사람들의 원망이 하늘에까지 이르니, 3년 동안 큰 흉년이 들었음에도 다시 그 이상의 재해가 발생하고 있다”(숙종24.1.8)
이처럼 당시 대기근은 날이 갈수록 참혹해지고 있었다.
숙종 때는 조정에서 ‘청나라’에서 쌀들 들여오자는 논의가 시작됐는데..
대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어죽는 상황에서 신하들은 이 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집의(執義:사헌부, 종3품) 정호(鄭澔)가 임금에게 아뢴 내용.
서곡(西穀)에 대해서 그 전말을 소상히 알지는 못하오나…(중략)
이해관계를 가지고 계산해 보아도 의리(원칙, 도리)를 가지고 헤아려 보아도 도무지 옳지가 않습니다(중략)
비록 우리가 거듭된 기근을 겪고 있다 하더라도 어찌 가벼이 우리의 약한 사정을 드러내어 보임으로써, 저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해야 하겠습니까? 더욱이 저들은 끝없는 탐욕을 지니고 있으므로 절대 남을 이롭게 하면서 자신들은 손해를 보려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은화(銀貨)를 들여 쌀을 들여온다 해도 저들은 필시 다 썩어 쓸모 없는 쌀을 내어줄 것이니, 보리 수확기에 이르기도 전에 그 효용은 다 할 것이며, 국고는 텅 비게 될 것입니다…(중략)
또한 곡식을 준 대가로 전하나 높은 신하로 하여금 직접 청나라에 들어와 감사인사를 하도록 요구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중략)
앞으로 저들이 들어주기 어려운 청을 한다면 무슨 말로 거절하시려는지요? …(중략)
의리의 면에서 보자면 더욱 옳지 않은 일입니다
(후략: ‘정묘, 병자호란 때 당한 치욕과 원한을 잊어버리고 저들에게 손을 벌려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이어짐).
여기서 ‘서곡’은 청나라로부터 쌀을 들여온 일을 말한다.
청나라로부터 쌀을 들여오자는 주장은 조선이 가진 자원만으로는 기근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경신 대기근’ 당시에도 논이 됐으나 “(청나라가) 곡식을 실어 나르는 일은 우리에게 요구한다면 결코 감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며 반대했었다.
‘청나라’로부터 곡식을 지원받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신하들은 ‘기술적인 문제’를 거론하며 반대했지만, 실상은 청나라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보았을 때, 비록 청에 굴복하기는 했지만 사대부들의 눈에는 어디까지나 ‘청나라’는 오랑캐이고 우리에게 치욕을 준 나라. 언젠가는 원한을 갚아야 하는 나라로 생각했고, 그러기에 ‘원수’한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종은 신하들의 반대로 ‘청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숙종은 “이 일은 내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온 나라의 백성을 위하여 만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다”며 반대 여론을 물리치고 청나라에 곡식을 요청한다.
조선의 공식 요청이 있은 지 얼마 후인 숙종 24년 4월 26일. 청나라는 무상 구휼미 1만 석과 교역할 쌀 2만 석을 110여 척의 배에 나눠 싣고 도착한다.
무상 구휼미를 1만석이나 주고, 육로가 아닌 해상 운송을 통해 전달한 것은 청나라 조정에서는 상당한 성의를 보인 것이었다.
해상 운송은 육로 운송보다 시일이 단축되지만, 비용이 더 발생하는데, 청나라 책임자였던 ‘도대’는 “해상 운송된 쌀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도록 한 것은 황제께서 귀방에 베푸신 특별한 은혜이니 바라건대 베푼 은혜에 감격하는 자문을 작성하여 제가 가지고 돌아가게 해주십시오”라는 감사인사만을 요구했다.
역시나 명분을 중시했던 사대부들은 도대의 발언이 “오만하고 패악하다”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