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자네 점괘는.. 어떻게 봐도 ‘죽음’이네.”
“…막을 순 없는 거요?”
“안돼!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있는 게 아냐.”
“….그렇다 해도 역사적인 발견을 포기할 순 없지.”
점쟁이 노파의 충고를 뒤로 한 채, 카나본 경은 하워드 카터와 함께 어둠으로 뒤덮인 묘지 속을 들어갔다.
이윽고 촛불에 의지해 어둠 속을 들어가던 둘의 시야에 곧 찬란한 황금빛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922년 11월 26일, 파라오(고대 이집트에서 왕을 지칭하던 말)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둘은 이 역사적인 발견의 기쁨을 나누며 곧 대기하고 있던 인부들을 불러들였다.
황금관에 새겨져 있던 다음의 경고문을 애써 못 본 척하고는.
“파라오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 죽음이 빠르게 날개를 타고서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4개월여 후인 1923년 4월 5일, 카나본 경은 56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된다.
투탕카멘의 얼굴에 있던 상처와 같은 부위를 모기에게 물려, 합병증을 앓게 된 지 열흘만의 일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당시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 발굴에 참여했던 이들이 차례차례 원인 미상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파라오의 저주는 죽음의 날갯짓으로 무덤 발굴원 전원을 찾아간다.
발굴
하워드 카터는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열정 하나로 20대 때 이집트 지역에서 유적지 주임 조사관직에 올랐던 고고학자였다.
그런 그가 30대 중반이 되어 당시 고고학자들의 꿈이었던, 후원자의 눈에 띄게 되는 행운을 얻는다.
그의 후원자를 자처하고 나섰던 이는 영국의 귀족 가문 출신인 카나본 경으로, 고고학에 빠져 이집트 유적에 관심을 두던 중 지인으로부터 하워드 카터를 소개받은 게 계기였다.
그렇게 하워드 카터를 필두로 한 조사단은 카나본 경의 절대적인 후원에 힘입어 고대 이집트 파라오들의 공동 묘역지인 ‘왕가의 계곡’에서 미발견된 파라오 무덤, 즉 투탕카멘의 무덤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1916년에 시작된 발굴 시도는 수년간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으며, 급기야 가문의 재산이 위태해진 지경에까지 이른 카나본 경은 하워드 카터에게 발굴 중지 의사를 내비친다.
하지만 하워드 카터는 투탕카멘의 무덤이 분명 왕가의 계곡 어딘가에 온전한 상태로 잠들어있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카나본 경을 끈질기게 설득했고, 이에 카나본 경은 발굴 연장을 결심하고는 자금줄을 찾기에 이른다.
그리고 여기서 카나본 경은 믿음직한 자금줄을 찾게 되는데, 그 자금줄이란 바로 언론사였다.
영국에서 가장 유서깊고 명망 있던 신문사 ‘런던 타임스'(타임스)’로부터 자금 협력을 받는 대신에,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하면 모든 정보는 런던 타임스 측이 독점권을 갖기로 한 것.
이러한 희대의 독점계약 덕분에 하워드 카터는 계속해서 발굴작업을 할 수 있었으나, 다시 몇 년이 흘렀음에도 끝내 투탕카멘의 무덤은 발견될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결국, 시간은 흘러 카나본 경의 지원이 마지막으로 계획된 1922년이 되었다.
그 해 11월 4일, 하워드 카터마저 크게 낙담하고는 발굴 정리를 생각하던 때였다.
조사단 인부 하나가 우연히 무덤 입구로 보이는 계단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파라오의 인장과 도굴되지 않은 흔적을 발견한 하워드 카터는 즉시 카나본 경에게 전보를 쳤다.
“카나본 선생님!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아직 발굴권을 팔면 안 됩니다!”
<투탕카멘 무덤 앞에서, 하워드 카터(좌)와 카나본 경(우)>
이처럼 기적적으로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한 하워드 카터는, 11월 26일 카나본 경과 무덤 안을 확인하면서 역사적인 발굴을 시작하게 된다.
황금! 장식품!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왕의 유물들이 세상 앞에 다시 나오는 순간이자, 20세기 최고의 발견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진실
그러나 이러한 발견 뒤엔 사소한 문제가 따르기도 했다.
카나본 경이 위태로운 자금 상황을 타파하고자 런던 타임스와 협약했던 사항으로 인해, 이와 같은 대발견을 두고도 오로지 런던 타임스 측의 선보도만을 그대로 따라야 하자 세계 언론들이 뿔이 나고 만 것.
한편, 이즈음 카나본 경이 불운하게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30대 중반 무렵 있었던 심각한 자동차 사고로 인해 후유증을 앓던 카나본 경은 이후 따뜻한 이집트에서 요양을 시도하지만, 그의 몸은 허약체질이 되어 버렸다.
그런 그가 투탕카멘 무덤의 발굴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모기에게 뺨을 물리게 되는데, 이후 면도를 하던 중 그만 모기에게 물린 상처 부위를 잘못 건드려 상처가 곪고 만다.
문제는, 보통 사람보다 면역력이 떨어지던 그의 몸 상태.
그렇게 곪은 상처는 염증을 통해 균이 몸속으로 침투하며 균혈증을 유발하는가 하면, 여기에 폐렴이 겹치면서 열흘간 앓던 카나본 경은 끝내 사망하고 만다(사실, 카나본 경은 이미 중년부터는 건강이 몹시 안 좋아 당시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했다는 하워드 카터의 전보를 받고도 20일이 넘은 뒤에야 현장에 도착함).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카나본 경이 어이없게 사망하자, 당시 런던 타임스와 독점계약을 맺어 그를 탐탁지 않아 하던 언론들이 그의 죽음을 파라오의 저주 때문이라고 기사를 실은 것.
그런데 우습게도 이러한 악담에 대해 대중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저주’라는 것이 일반 대중들에게 미스터리하고 낭만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반응에 언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온갖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파라오의 저주 전설’을 확장해나갔고, 대중들은 이를 계속해서 기꺼이 소비했다.
그렇게 ‘이야기 장사’는 문화 콘텐츠로까지 넘어갔고, 수많은 파라오의 저주 전설들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진실을 말하자면, 파라오의 저주와 관련해 사실인 부분은 카나본 경이 모기에 물린 뒤 합병증으로 사망했다는 것이 전부다.
애초에 투탕카멘 무덤에는 저주를 내릴 것이라는 경고문도 없었으며, 투탕카멘의 뺨에는 흉터도 없었다.
또 당시 무덤 발굴에 실질적으로 관여했거나 무덤, 부장품, 미라에 직접 손을 댔던 20여 명이 넘는 이들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평균 사망 연령이 70세를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했던 이들이 사실은 다른 이들보다 평균적으로 훨씬 오래 살았던 것이다!
사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당시 투탕카멘의 황금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었으니 말이다.
“파라오의 이름을 알리는 자, 축복이 있으라.”
에필로그
투탕카멘의 경우,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사망한 비운의 파라오로도 잘 알려졌다. 이 때문에 그가 생전 권력의 암투로 인해 암살당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었으며, 이러한 가설은 그의 미라가 X-선 촬영된 이후 제법 신빙성 있게 떠돌기도 했다.
X-선 촬영 결과 그의 두개골에서 골절상이 발견되었기 때문.
허나 이후 실시된 CT 분석 결과, 이러한 골절상은 그의 사후 미라로 만들던 과정에서 생긴 것(아직 뼈가 다 굳기도 전에 사망했으므로)으로 결론지어졌다.
최근의 CT 및 DNA 분석에 의하면, 투탕카멘은 당시 왕가의 근친혼으로 인해 유전병을 앓고 있어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했다고 한다.
투탕카멘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전차에서 낙상 후 골절부위에 말라리아 감염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설과, 유전적인 혈액질환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했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이후 현장에서 은퇴하고는 풍요로운 연구 생활을 하다가 64세의 나이로 사망(병사)한다.
출처 – 공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