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갈의 주장, “세종은 노비를 늘린 노비왕”은 사실일까?

2017년 9월 4일   admin_pok 에디터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세종대왕.

훈민정음(한글)을 창제, 반포한 왕이며,

문과와 이과 모두 능통한 왕이어서 과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법한 장영실부터 시작해서, 이순지,이천,정인지 등 다수의 과학자들을 등용해, 너무나 유명한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등을 만들고,

아버지인 태종시기에 제작된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字)를 개량하여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어 당시에 하루에 인쇄할 수 있는 최대 장수가 4장 이었던 활자기술을 하루에 40장도 거뜬히 찍어낼수 있을정도로 발전시킨다.

또한 화약무기에도 관심이 많아, 우리가 가장 잘 알고있는 로켓병기 신기전이 세종시대 장영실에 의해 제작되고, 아버지 태종시기에 일발다전법(화약량을 줄이고, 한번쏴서 여러발의 화살을 발사하는 방법)이 연구되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는데, 세종대왕 시기에 이를 완성시킨다.

이 외에도 다양한 화약무기를 발전시키는건 물론 체계적으로 표준화,구격화 시키고 그 화약무기를 사용해 전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사격술을 발전시키고 화약 운송부대를 따로 만들고 부대의 운영법을 법으로 제정하는등 조선시대에 상대적으로 천시되던 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참고로 저렇게 화약무기를 표준화,구격화 시키고 화약운송부대를 따로두는 전법등을 고안해낸건 세종대왕이 세계최초이다.

이러한 화약무기의 발전은 후대에도 엄청난 영향를 끼쳤다. 특히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은 세종대왕의 덕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것이다.

또한 농사직설을 편찬하기도 하는등 농업에 관심이 많았으며, 호적 조사가 매우 잘 이루어져 조선 역사상 세종대왕 시기에 가장 높은 생산량을 기록한다.

세종대왕 시기의 생산량은 무려 500년뒤에서나 겨우 따라잡을 수준으로 매우 높았다.

참고로 세종대왕의 시기에는 아직 모내기(이앙법)같은 농업 개혁이 일어나기 한참 전이었다.(물론 선조 이후로 임진왜란 때문에 대다수의 생산가능인구가 상실되고 농지가 파괴되긴 했다.)

이를 통해 세종 시기에 조선이 가장 부유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연구기관 집현전 설치, 삼복법 실시, 고려사 편찬, 법전 속윤전 편찬 ,악기 편전 제작, 여진족 토벌후 4군 6진 설치,대마도 정벌, 용비어천가 편찬 등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문학,과학,군사력,경제,법 그야말로 영향을 끼치지 않은 분야가 없을정도로 수도없이 많은 업적을 남긴, 그야말로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이다.

그런데, 이런 세종대왕을 터무니 없는 사이비 지식으로 음해하는 세력이 있다.

흔히 메갈이라 불리는 (자칭 페미니스트) 여성 커뮤니티 회원들이다.

이들은 트위터, 워마드, 여성시대 같은 수많은 여초 커뮤니티에 퍼져서 남자라면 그 누구라도 억지 논리로 까내리고 있다.

이들이 세종대왕을 비하하는 논리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1.색을 밝혀 각종 성병에 걸렸다.

2.고기를 좋아해 살이 많이 쪘다.

3.조선시대에 노비를 기하급수적으로 불린 노비왕이다.

특히 노비를 기하급수적으로 불렸다는 점에 많은 이들이 왜곡된 사실로 받아들이는 일이 늘고 있다.

세종대왕의 전시기에 5~10%에 불과하던 노비 비율이 세종시기에 30~50%로 불어났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한다.

우선, 세종대왕 시기에 갑자기 노비수가 50%로 불어난게 아니라, 1세기,2세기가 지나갈수록 서서히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세종시기 이전에 노비 비율은 이미 2~30% 로 터무니 없이 높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세종이 노비를 불렸다고 주장할까?

바로 이 때문인데, 세종이 만들고 경국대전에서 법제화 되었다.

하지만 과연 노비수가 대폭적으로 증가한게 노비종모법 때문이라 할 수 있을까?

우선 조선의 극 초기에는 동색혼(같은 신분끼리의 결혼 ex)양반-양반 양인-양인 상민-상민 노비-노비)만을 인정했으며,

양천교혼(양인과 천민의 결혼)을 금지시켰다. 만약 이런일이 발생할경우 일천즉천 이라고 해, 이미 고려 충렬왕시기에 부모중 하나라도 노비면 자식도 무조건 노비인 법이 존재했다.

다시말해 고려시기에 이미 종모종부법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에따라 노비수가 점점 감소하고 있었는데, 이를 막기위해 태종이 노비 종부법을 제정하고, 양천교혼을 허용했다.

다시말해 노비수를 유지시키기 위한 노력은 세종대왕 이전에도 꾸준히 있어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노비 종부법은 애초에 문제가 많아 폐단이 많이 벌어져 세종이 종모법으로 고쳤을뿐이다.

설명하기 복잡한 여러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종부법이 종모법으로 바뀌었으나, 사실 노비수 유지에 있어서 종부법이나 종무법이나 차이가 없다.

종부법을 종모법으로 고쳤다고 세종이 노비를 증가시켰다는건 사실상 억지에 가까운 주장이다.

또, 과연 폭발적인 노비수 증가는 종모법 때문일까?


▲제임스 버나드 팔레(1934~2006)

제임스 팔레는 미국인 한국역사학자로, 미국 한국학의 대부로 평가되는 최고의 역사학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팔레 교수의 연구를 지원하고 싶다”며 100만 달러의 한국학 기금을 마련했지만 그는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객관적 연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이를 거절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분은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거절하신분이다.


이분의 저서 Confucian Statecraft and Korean Institutions 의 225p에 의하면, 노비수 증가의 이유는 종모법 때문만이 아닌, 이른바 협호라고 불리는 자발적으로 농민,양인들이 양반가문의 노예가되기를 자청한행위가 16세기부터 횡행한게 주 원인이라고 보고있다.

다시말해 종모법 보다는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려는 양인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얘기다.

그 이유는 바로 노비는 납세의 의무와 군역의 의무 또 수시로 불려나가는 기타 잡무의 면제대상 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노비가 된다면 군대도 안가고 세금도 안내고 살 수 있다는 말이다.

16세기 이후로 임진왜란(특히 조선의 역사는 임진왜란 전과 임진왜란 후로 명백하게 갈린다고 할정도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물자피해를 보았으며, 특히 농업과 상업기반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임진왜란 전에는 조선의 경작지가 150만 결에 달했는데 임진왜란 이후로는 30만결로 줄어듦)

병자호란등 수많은 전쟁을 차례차례 겪으면서, 양반은 물론 양인들의 생활수준 또한 급격하게 추락한다.

전쟁 때문에 농사지을 땅이 사라져 버려서 어차피 돈은 못버는데, 노비들은 나랑 똑같이 농지가 없는데 돈도벌고 세금도 안내고 군대도 안가는데 유혹당하지 않고 베겼을까?

애초에, 조선시대의 노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는 16세기 후반 이후로, 종모법 개편과 노비수의 증가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더군다나 세종의 시대에는 노비에 대한 처우도 상당히 좋은편이었다.

또 15세기에 만들어진 법을 21세기의 가치관으로 판단하는것도 우스운일이다.

일본은 16~17세기가 되어서야 노예제도가 사라졌고, 미국에는 19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오히려 노비처우 개선에 막대한 공헌을 한 세종대왕은 당시의 기준으로는 노비들에게도 성군임에는 분명하다.

3줄 요약

1. 노비 종모법은 노비 종부법을 정치적이유로 개정한것으로 종모법이나 종부법이나 노비수 변화에는 큰 차이가 없다.

2. 16세기 이후로 노비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는 협호라고 불리는 자발적 노비화 때문으로 종모법과는 관계 없다.

3. 애초에 15세기 초반(정확하게 1432년)에 지정된 종모법과 노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16세기 후반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