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발발 직전, 남과 북그리고 중국의 상황

2017년 September 7일   admin_pok 에디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유엔 총회는 이에 따라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한반도에 수립된 합법 정부임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 정부가 수립되었다.

1949년, 당시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군은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곧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1949년 10월 1일)

그러나, 중국은 당시 국민당군을 원조하던 미국의 움직임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첫째, 수많은 국민당군 포로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둘째, 국공내전 중 새로이 생긴 동북부 지역의 조선족 병사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그 방안이 논의중이었다.

그러한 정세 속에서,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남침 전쟁을 계속해서 건의한다.

그러나, 스탈린은 초기에는 김일성의 남침 제안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1949년 3월 김일성이 처음 남침을 제안하자, 전쟁을 단기간에 끝낼 수 있고 또, 미국이 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어야만 남침이 허용될 수 있다고 하면서 반대했다.

1949년 8월 김일성은 한번 더 스탈린에게 전쟁건의를 하나 또다시 한번 거절당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그 이후 곧바로 중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중국”이라는 변수로 인해 스탈린은 김일성의 건의를 수락한다.

 

그러나, 소련의 수락은 중국의 개입이 전제된 수락이었다.

결국, 마오쩌둥은 “전쟁은 이제 공동의 과제가 되었다.”라는 선언을 통해 북한의 계획을 재가하고 전쟁에 개입한다.

그로 인해, 국민당군으로부터 노획한 미군 무기와,

또,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조선족 3개 사단(약 4만명 규모)이 전쟁 직전 북한의 최전선에 배치된다.
이들은 항일 투쟁과 국공 내전을 거친 정예병들이었기에, 그 수준과 사기가 국군은 물론 북한군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당시 국군 역시 대비를 아주 허술히 하지는 않았다.

당시 국군은 노동절(5월 1일), 국회의원 선거(5월 30일), 북한의 평화공세 등 일련의 주요사태를 전후하여 오랫동안 비상근무를 계속하여 왔다.

그러나, 북한의 가짜 평화공세로 인해 비상경계령이 6월 23일 24시를 가해 해제되어 전쟁 직전 병력의 1/3 이상이 휴가를 위해 외출 중인 상태가 되었다.

결국 이렇게 대한민국은 무방비로 중국과 소련의 힘을 업고 밀려오는 북한군을 당해 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