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까지 거슬러 본, 대한민국 똥군기의 역사

2017년 September 19일   admin_pok 에디터


유독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군기 문화.

군대는 말할것도 없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심하면 직장까지 남녀 구분없이 어디든 존재한다.

물론 다른나라에도 이런 군기가 있지만 선후배 사이를 중요시 하는 한국에서는 특히 더 심해 똥군기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다.

과연 이러한 대한민국의 군기 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아봤다.

똥군기가 역사에 최초로 기록되어진 것은 놀랍게도 조선왕조실록이다.

일반 역사서나, 민담설화가 아닌 국가의 중요한 일을 적는 조선왕조실록 말이다.

못배운 일반 백성들이나, 노비들이 아닌 바로 이 유교를 배운 선비들이 악랄하게 군기를 잡았다는 것이다.

특히 성균관 유생과, 그 출신 선비들이 만든 문화였다.

그리고 이 군기가 얼마나 심했는지, 왕이 직접 나서서 어명을 내리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 조금 지나면 어명을 잊은채 이러한 똥군기가 성행했다.

그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군기에 대해 살펴보자.

<명종실록> 1553 (명종8년)

성균관, 승문원, 교서관에서 신입생이나, 신참 과거합격자가 들어오면 환영식 연회를 여는데, 이 비용을 모두 신참이 내도록 했다.

<중종실록> 1541 (중종36년)

기록에 따르면

신참은 말단 관리들부터 육조판서까지 한명씩 돌아가면서 한달동안 술과 뇌물로 대접을하니,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논밭과 집은 물론이고 노비까지 팔아서 신고식 비용을 대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어떤 신입생은 수만 량의 거금을 탕진하기까지했다.

성종 24년(1493) <성종실록> 에 언급된 것처럼, 가난한 과거합격자들 중에는 신고식 비용이 부담되서 아예 출사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다시 <중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신입생의 온몸에 진흙을 바르거나, 매질을 가했음은 물론이고

한겨울에 물에들어가 고기를 잡게하고, 한여름에는 뙤약볕에 그냥 세워두기도 했다.

이로 인해 불구가 되어 죽는 사람도 생겼다.

<선조실록> 1569 (선조2년)

시궁창의 오물을 떠서 신입생의 얼굴에 칠하거나, 갓과 의복을 벗긴뒤 오물에 밀어넣고 뒹굴게 시켰다.

<중종실록> 1520 (중종 15년)

대궐 안에서 신입생에게 술을 얻어먹은 예문관 고참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신입생을 거꾸로 매달고 발바닥을 때렸다.

신입생의 고통스런 고함소리가 대전에까지 들려, 임금이 그 연유를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이밖에도

무거운 대들보를 들게해서 못들면 매질하기

부뚜막의 그을음을 손에 묻히게 한뒤, 손을 씻고 그물을 마시게 하기

신참은 보름씩 숙직을 시켜 잠못자게 하기

여성의 오줌을 얼굴에 바르기 등등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똥군기 문화와 별반 다르지 않은 악행들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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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런 똥군기가 과연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중종실록> 1541 (중종 36년)

이렇게 버티기 쉽지 않은 똥군기가 선비들 사이에 만연하니, 그 기원을 알아보기 위해 사헌부가 조사를 한 기록이 있다.

“당나라·송나라 시대를 살펴보건대,

…… 신진 선비들을 지극한 은혜로써 사랑했을 뿐 조금도 좌절시키거나 모욕을 주지 없었습니다.

…… 또 야만족인 원나라의 비루한 풍속에도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중국 예법도 아니고, 그렇다고 야만족들 풍습에도 그런 군기 문화는 없었다는 것이다.

“전조(前朝, 고려) 말엽에 조정이 어지러워 권력자의 자제들이 제 뜻을 이루어 교만하고 횡포하게구니, 고참들이 이를 근심하여 전례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답은 고려였다.

고려말에 고위층 자제들이 음서제로 관직에 오르니, 유학을 공부해 과거로 관직에 오른 신진 사대부들은 그게 꼴사나웠던 것.

그래서 신입생들이 들어오면 고위층 자제라도 신입생 길들이기를 시작하다 보니 그 똥군기가 결국 조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조선 선비들이 자신들은 과거로 등용됬다는 프라이드를 군기 문화로 나타낸 것이다.

과거합격증 = 갑질티켓

연암 박지원은 양반전에

“과거 문과에 합격해 사대부로 진출하면 온갖 재물이 다 생기니 과거합격증이 바로 돈 자루다.”

“양반들은 이웃집 소도 제 집 소처럼 부릴 수 있고 동네 사람들을 붙잡아다 제집 밭일도 시킬 수 있었다.”

“또한 양반들의 종년 겁탈은 누운 소를 올라타는 것보다 쉽다”

고 했다.

과거합격증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홍도가 그린 실제 과거시험 그림이다.

시험지 하나에 삼삼오오 모여서 정답게 답을 쓰고있다.

과거 합격의 막강한 힘을 얻기 위해 컨닝과 부정행위가 넘쳐났던 것이다.

1) 대리로 시험 답 써주기
2) 남의 답 베끼기
3) 이미 낸 답안지를 다시 가져와 시험장 밖으로 보내 수정해서 다시 제출
4) 합격 담안지랑 바꿔치기
5) 시험장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답안 작성해 보내기
6) 시험관에게 뇌물제공
7) 콧속, 붓대 끝에 컨닝 페이퍼 숨기기
8) 땅굴파서 답안을 시험장 안으로 들여보내기 등등등………………….

물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라 엄격히 과거시험이 진행됐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런 부정행위가 더욱 심해져서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빽이 없거나 뇌물을 쓰지 않고는 절대로 합격할 수 가 없게 되고 만다.

나라를 다스릴 관리들을 저렇게 뽑으니 당연히 조선은 더욱 썩어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