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식인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

2017년 September 29일   admin_pok 에디터

사람들이 아사 직전의 극한 상황에 몰린다면 끝까지 이성을 놓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이때 식인(cannibalism)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극단적인 생존 방법이다.

물론 그 선택은 당하는 사람이나 행하는 사람이나 의심할 바 없는 엄청난 비극이다.

그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식량으로 삼았던 몇가지 사례들을 알아보자.

맥퀴리 하버 탈출 사건 (macquarie harbour)

1820년대 초, 영국의 감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영국정부는 좀도둑부터 살인마까지 다양한 죄질의 범좌자들을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호주 남부 해안의 섬, 타스메니아(Tasmania)로 이동시켰다.

지도 남쪽을 보면 주황색으로 칠해진 TASMANIA 라는 섬이 보이는가?

바로 저기다.

특히나 살인과 같이 죄질이 나쁜 죄수들은 바깥 세상과 완전히 차단시킨 맥쿼리 하버로 보내져 수년간 고된 노역을 해야 했다.

이곳에서의 노역 생활은 악명이 자자했는데 죄수들은 차라리 교수형 당하는 것이 낫다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덕분에 몇몇 죄수들이 동료 죄수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1822년 9월, 공동 작업에 동원된 8명의 죄수들은 고된 노역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간수를 뒤에서 덮친 후 나무에 묶고 약간의 식량과 도끼 하나만을 들고 도주한다.

탈출한 8명은 배를 훔쳐타고 아시아쪽이나 남미로 가려고 했다.

죄수들은 배를 훔치는 데는 성공했지만 탈출 사실은 바로 들통나면서 간수들에게 알려졌고 결국 바다로 나가는 유일한 항구가 폐쇄당하고 만다.

죄수들은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해 숲이 울창한 미개척지를 지나 육지의 다른 거주지로 향했다.

육지로의 탈출을 감행한 죄수들은 여태 꽤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중 단 한번도 성공한 탈옥은 없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죄수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다른 방안은 없었다.

핑크색 화살표 보이는가? 저게 죄수들이 이동한 경로다.

왼쪽에 항구라고 적혀있는 곳이 맥쿼리 하버다.

쨋든 그들이 가는 길목에 위치한 100km에 달하는 가파른 산맥에는 먹을 만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8명의 죄수 중 로버트 그린힐이란 죄수가 무리의 리더가 되었다.

그린힐은 선원 출신이었어서 태양과 별로 방향을 가늠할 줄 알았고 유일한 무기였던 도끼를 가지고 있던 자였다.

탈출을 감행한지 8일째.

그들은 완전히 기아상태가 되었다.

앞서가던 5명의 죄수들은 체력이 약해서 자꾸 뒤쳐지기만 하던 3명을 귀찮게 여겼고 결국 무리는 강한 쪽과 약한 쪽 2무리로 나뉘게 된다.

리더인 그린힐과 그의 친구였던 트레버스, 보든햄, 매더스, 피어스가 한 무리를 이뤘고 달튼, 캐널리, 브라운이 또 다른 한 무리를 이루었다.

밤이 되자 두 무리가 따로 불을 피우고 잠을 청했다.

그때 리더인 그린힐이 자신의 무리에게 소름끼치는 제안을 한다.

선원이었던 그린힐은 선원의 관습을 예로 들며 얘기를 꺼냈다.

선원들의 관습이란 생존이 어려울 시 최후의 수단으로 제비뽑기를 해서 선택된 한 명을 먹고 나머지가 생존할 수 있도록 한다는 거였다.

절박했던 그린힐의 무리는 전원이 찬성한다.

하지만 그들은 제비뽑기로 희생자를 정하는 대신 약한 3명의 무리에서 그들의 희생자로 골랐다.

희생자로 선택된 인물은 달튼이었다.

선택의 이유는 죄수 캠프에서 달튼이 규율을 어긴 동료 죄수들을 간수 대신 채찍질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약한 무리의 3명이 모두 잠들자 그린힐은 달튼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친다.

죽은 달튼의 시체는 농부 출신인 트레버스가 양을 도살해본 경험으로 손질했다.

다들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었지만 그날 밤 달튼의 살점을 먹은 사람은 그린힐과 트레버스뿐이었다.

하지만 아침이 되자 고기 냄새에 이성을 잃은 나머지 죄수들도 달튼의 살점을 먹었다.

배를 채운 죄수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죽은 달튼과 같은 무리였던 브라운과 케널리는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고 앞의 5명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다시 맥쿼리 하버로 돌아갔다.

다음 희생자는 자신들이 될 거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린힐의 무리는 한참 후에야 2명이 없어진 것을 알았고 이로 인해 그들의 생존 게임에는 큰 차질이 생겼다.

5명의 죄수들은 한 번의 살인으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무리 중 또 다른 누군가가 죽게 되리란걸 알게 됐다.

5일 후 고기가 바닥나자 다음 희생자를 정할 때가 왔고 극도의 긴장감이 흘렀다.

결국 제비뽑기를 했고 당첨자는 보든햄이 됐다.

보든햄은 그 즉시 도살당했고 나머지는 그의 살로 굶주린 배를 채웠다.

이제 남은 사람은 4명뿐이었다.

4명의 관계를 살펴보면 도끼를 가진 그린힐과 그의 친구 트레버스가 무리 중 우위였고 나머지 매더스와 피어스가 약자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굶주림이 다시 그들을 덮쳤고 어느덧 다음 희생자를 정할 때가 왔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매더스는 피어스에게 둘이서 그린힐과 트레버스를 덮쳐 도끼를 빼앗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피어스가 택한 건 강한 쪽이었다.

피어스의 배신으로 매더스는 그들의 식사거리가 되었다.

이제 친구 사이인 그린힐과 트레버스, 외톨이인 피어스 이렇게 세 사람이 남게 된다.

누가 봐도 다음 차례는 피어스였다.

트레버스에게 불행한 사고가 닥치기 전까진 말이다.

숲에서 트레버스가 독사에 발목을 물린 것이다.

그린힐은 친구인 그를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트레버스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고 물린 부위는 썩기 시작했다.

가망이 없음을 직감한 트레버스는 자신을 죽여달라고 한다.

결국 트레버스가 다음 희생자가 됐다.

마침내 두 명만 남게 되었다.

그린힐과 피어스 사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흘렀다.

언제든 상대방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를 죽이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그게 지켜지지 않으리라는건 둘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둘은 잠도 재대로 자지 못한다.

이제 누가 오랫동안 안 자고 버티냐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삼일 밤낮을 꼬박 샌 채로 계속 걸었다.

상황은 극으로 치달았지만 죽지 않으려면 견디는 수 밖에 없었다.

4일째가 되던 오후 결국 잠이 든 쪽은 그린힐이었다.

그린힐이 잠들자 피어스는 곧바로 도끼를 집어들고 그의 머리를 친다.

이로써 알렌산더 피어스가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피어스는 그린힐의 고기를 먹고 일주일을 더 걸어 탈출 50일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유를 만끽하기도 전 그는 다시 붙잡히는데 피어스에게 숲에서 일어난 식인에 대해 들은 간수들은 처음엔 이를 믿지 않았다.

기독교를 믿는 영국인이 식인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간수들은 피어스가 나머지 죄수들이 추적을 피해 달아날 수 있도록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피어스는 다시 맥쿼리 하버로 이송됐고 다른 죄수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는다.

그 중 젊은 청년이었던 토마스 콕스란 놈이 재탈출하자고 피어스를 꼬드긴다.

지옥을 경험했던 피어스로는 처음엔 내키지 않아 했으나 결국 탈출에 동의한다.

육로로의 탈출은 불가능하단걸 알고 있던 피어스는 이번엔 킹 리버를 헤엄쳐 건너기로 했다.

그런데 5일간 걸어 킹 리버에 도착해 강에 뛰어드는 순간 킹 콕스가 갑자기 수영할 줄 모른다고 얘기한다.

화가난 피어스는 변명을 늘어놓는 콕스를 그 자리에서 죽인다.

피어스는 콕스의 허벅다리와 종아리 살을 챙겨들곤 그 자리를 떠난다.

그렇게 2~3일 가다 보니 후회가 엄습해왔고 피어스는 해안가에 맥쿼리 하버를 오가던 배를 붙잡고 자수를 해버린다.

따라서 피어스가 유죄를 받은 것은 물론이었다.

1824년 7월 19일 알렉산더 피어스는 식인 행위로 교수행에 처해졌다.

미뇨넷호 난파 사건 (mignonette ship)

1884년 여름 미뇨넷호 4명의 선원들은 요트 한 척을 본국인 영국에서 호주의 새 주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다.

미뇨넷호에는 경험 많은 경주용 요트 조타수인 선장 탐 더들리랑 역시 경험 풍부한 선원 네드 브룩스, 항해 담당 에드윈 스티븐스, 처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잔심부름꾼 리처드 파커가 승선해있었다.

미뇨넷호는 14년 전에 만들어진 꽤나 오래된 배였고 상태는 아주 개판이었다.

19세기에는 배들이 부실했기에 선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는 위험한 직업이었다.

미뇨넷호가 침몰한 1884년만 해도 550여척의 영국 배가 침몰했다고 한다.

항해를 시작한지 7일 후인 7월 2일, 풍랑을 만나자 미뇨넷호는 어찌해 볼 새도 없이 침몰해버린다.

다행히 더글리 선장과 그의 선원들은 무사히 소형 보트에 옮겨탔지만 그대로 대서양을 표류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은 통조림 2개, 나이프 하나, 경도 측정 시계뿐 마실 물조차 없었다고 한다.

배가 난파된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는 세인트 헬레나와 트리스탄 드 코나라는 곳으로 각각 북쪽과 남쪽 1200km 지점에 있었고 희망봉은 동쪽으로 2600km, 남미는 서쪽으로 3200km나 떨어져 있었다.


▲빨간 점이 난파된 지점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희망봉을 지나는 배들의 항로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표류한지 24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심한 갈증이 찾아왔다.

통조림이랑 빗물, 바다거북따위로 잠깐 동안은 이를 견뎠지만 그마저도 바닥이 나니까 그들은 허기와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했다.

표류한지 일주일 쯤 되었을까.

갈증이 최고조에 다다랐고 항해가 처음이었던 파커는 목마름에 바닷물이라도 마시려 했다.

선장인 더글리는 바닷물이 탈수증을 초래하는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를 저지했다.

더글리는 빨리 구조되지 못하면 선원관습에 따라 제비뽑기로 희생자를 골라 인육이라도 먹어야 될 거라고 생각했다.

더글리는 이를 선원들에게 말했고 다들 망설이는데 브룩스가 격하게 반발했다.ㅏ

결정은 유보되었고 표류한지 3주 가량이 지난 7월 20일 밤.

파커는 갈증을 못참고 바닷물을 마셔버리고 만다.

아침에 잠에서 깬 동료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파커를 보게 된다.

파커가 죽으면 혈액이 응고되서 마실 피가 없어질거라 판단한 선원들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반발하던 브룩스에게 더글리는 남은 가족들을 생각하라고 했다.

파커만 빼고 모두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처드 파커

모두가 동의한 가운데 더들리가 파커의 목을 찌르고 그 피를 통에 담았다.

더들리와 스티븐스, 맹렬히 반발하던 브룩스도 갈증을 못이기고 파커의 피를 허겁지겁 마시게 되었다.

세 사람은 파커의 피로 목을 축인 후 살을 발라 날것으로 먹었고 남은 살점은 햇볕에 말렸다.

작은 보트 안은 피와 살점들로 난자했다.


▲실제 1884년 미뇨넷호 선원들이 탔던 구명보트

그로부터 4일이 지났고 남은 고기는 거의 부패한데다 피는 상했다.

7월 24일 또 한명의 희생자가 필요해진 순간 기적적으로 그들 눈 앞에 독일 배 한 척이 나타났다.

그들은 다행히 구조되었고 2주간을 먹고 자기만 했다고 한다.

체력이 어느정도 회복되자 더들리 선장은 독일인 선장을 만나 그동안 있었던 상황을 털어놓았다.

더들리는 동료를 죽이고 인육을 먹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한 명을 희생해 나머지 3명을 살렸기 때문에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토마스 더들리

구조된 지 3개월이 지난 후 미뇨넷호 생존자들은 본국인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미뇨넷호의 주인에게 모든걸 털어놨다.

더들리는 이걸 이유로 소송 당할 거란 생각은 전혀 못했다.

결국 세 사람은 모두 체포되었고 그들은 분노했다.

선장이었던 더들리 입장에서는 선원 대부분을 살렸기 때문에 체포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봤는데 영국 정부는 아무리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식인은 용납할 수 없는 잔혹한 행위라고 규정지었다.

당시 영토를 확장 중이던 대영 제국은 원주민들이 야만적이라 구원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에 대한 증거로 원주민들이 식인을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때문에 영국 선원이 식인을 했다는 사실은 정부 입장에선 영토 확장에 문젯거리가 되었던 셈이었다.

영국 정부는 선원 관습을 금지하기 위한 선례로 삼으려고 미뇨넷호 선원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려했다.

그들을 기소하기 위해 검찰은 살인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브룩스를 검찰 측 증인으로 세워 브룩스는 증인을 해주고 기소를 면할 수 있었지만 더들리와 스티븐스는 리처드 파커에 대한 살인죄로 법정에 서게 된다.

하지만 당시 여론은 선원들의 편이었다.

이렇게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1884년 11월 배심원들은 더들리와 스티븐스에게 동정적이었기때문에 무죄를 결정한다.

하지만 판사는 이를 무효화시키고 특별법을 이용해 자신에게 전권을 넘기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결국 재판에서 더들리와 스티븐스는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선원들의 관습에 제재를 가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영국 정부는 수감 6개월만에 두 사람을 석방한다.

당시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더들리는 이런 말을 했다.

” 이것으로 선원들의 관습을 금지시킨 줄 알겠지만 진실을 감추게 됐을 뿐이다. 조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관습을 따르되, 구조된 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

모든 사건이 종결된 뒤 증언을 했던 브룩스는 떠돌이 서커스단에 스카우트되었다.

서커스단에서 브룩스는 식인마로 분장하고 관객들 앞에서 날고기를 씹어댔다.

그는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결국 궁핍한 삶을 살다 죽었다.

불행하긴 스티븐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시의 충격으로 다신 배를 타지 못했고 브룩스와 마찬가지로 알코올 중독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더들리는 호주에서 사업가로 성공했지만 페스트로 사망한 최초의 호주인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