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고아 수출국 중 1-2위를 다툰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그런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대영제국 역시 자국의 고아 및 빈곤층 아이들을 모아서 자국의 식민지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으로 보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마가렛 험프리스.
1986년 영국 노팅검에서 사회복지사 일하던 마가렛 험프리스는 호주의 한 여성으로 부터 부모를 찾아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받는다.
자신은 어렸을 때 영국에서 부모와 헤어져 호주로 보내졌고 그 후 모진 고생을 하며 살았다며 죽기 전 자기의 뿌리를 알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내용 이었다.
이 믿을 수 없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마가렛은 반신반의 하는 심정으로 조사를 하게 된다.
조사 결과는 놀라웠다.
어린 아이 강제 이민은 17세기 부터 영국 정부의 비밀 정책이었다.
영국인 위주의 이민 식민지 였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로디지아 (현 짐바브웨) 등의 백인 인구의 증가를 위해 영국 정부는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 출신 위주로 고아들 및 결손 가정의 아이들의 강제 식민지 이민을 단행했다.
게다가 이 강제 이민은 영국 내 부랑아의 숫자도 줄였고 아동용 사회복지 비용도 절감하는 좋은 방법으로 여겨졌다.
19세기 말의 약 10년 간 카톨릭 교회의 복지시설을 통해 캐나다로만 2만명 이상의 영국 아동이 수출되었다.
이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땅에서 집과 양부모를 주겠다는 달콤한 거짓말을 주입 시켰으며 캐나다의 경우 대부분의 경우 이 약속이 지켜진 것으로 나타났다.
호주 농장에서의 아동노동 20세기 초.
호주에서 아무런 안전 장비 없이 건축 작업에 투입된 이민 아동.
하지만 호주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배에서 내리자 마자 절반 이상의 아이들은 바로 서부 호주의 벽지에 위치한 대농장의 노동자로 끌려가서 호주 시민권도 없는 무국적자로 도망갈 수도 없는 상태로 죽도록 일 만해야 하는 상태에 빠진다.
호주의 교회에서 운영하는 시설로 보내진 아이들 역시 구타와 성폭행 등을 당하며 교육도 받지 못한채 종일 노동만 해야하는 비참한 상태를 견뎌야 했다.
20세기 초 대공황 시대에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이던 영국의 아동 수출은 2차대전 후 고아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자 다시 재개된다.
40-50년대에 1만명 이상의 고아들이 호주로 보내졌으며 영국의 아동 수출 총 숫자는 20만명이 넘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호주의 경우 여자 아동의 강제 이민 숫자가 남아의 2배가 넘는다는 것.
호주로의 영국 아동 강제 이민은 1970년대에 들어서 멈춰지게 된다.
이런 사실을 밝혀낸 마가렛 험프리스는 아동 이민 트러스트를 조직하여 호주로 강제 이민당한 사람들의 부모를 찾아주었고 지속적인 문제 제기로 결국 2007년 호주 퀸즈랜드와 서호주 지방의회는 사과 성명과 함께 보상에 나서겠다고 발표한다.
또한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와 호주의 케빈 러드 총리 역시 사과 성명을 내고 보상위원회 구성을 알렸다.
하지만 캐나다의 경우, 2009년 이민부 장관 제이슨 케니의 인터뷰에서
캐나다는 아동 이민 관련 사과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으며, 캐나다에 정착한 모든 영국 아동의 대우에 문제가 없었다. 호주의 경우와는 다르다
고 밝힌다.
게다가 캐나다는 20세기 들어서는 아동 이민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들며 사과와 보상 둘 다 캐나다에는 해당이 없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