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마지막 ‘민주화 운동’

2017년 December 18일   admin_pok 에디터

천안문 6.4항쟁.

1989년 4월 15일 ~ 1989년 6월 4일. 

천안문광장에 모인 시민들. 칭화대, 난카이대 등의 대학 깃발도 섞여있는 것으로 보아 대학생들로 보인다.

1989년 4월 말부터 계엄령이 선포된 5월 20일까지 2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시위에 참여했다.

민주화와 부정부패의 척결을 외치며 수많은 사람들이 단식투쟁에 참여했고, 이것에 자극받은 시민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점점 몰려들기 시작했다.

모택동 초상화에는 페인트가 칠해졌고

학생들은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을 본따 ‘민주주의의 여신’석상을 만든다.

공산당의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이루겠다는 민중들의 뜻을 형상화하는 의미에서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위치에서 제작됐다.

베이징 공안들은 시위에 우호적이었다.

베이징 공안은 시민과 학생의 민주화 시위를 지지한다는 뜻에서 행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무력탄압에 동원된 부대는 ‘베이징에 지인이 없고, 베이징 시민에게 무차별 발포하는데 큰 저항감이 없을’ 신장 자치구 등에서 차출된 군인들 이었다.

학생 지도자 ‘왕단’이 거리에서 호소하고 있는 모습

단식투쟁을 벌이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중국 정부는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언론이 곧 시위에 합류했다. 승리의 일보 직전이었다.

이때는 여유와 유머가 있는 시위 현장이었다.

시민들은 V자를 그리며 다가올 승리를 축하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 시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교육 실습생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개혁을 부르짖는 깃발들

베이징 일부 지역에 한정해서 ‘계엄령’이 선포되더니.. 중국 당국은 약 5만명의 대군을 베이징에 투입한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강력하게 저항하며 이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인민해방군이 시위대한테 포위되었을 땐, 시민들은 물과 음식을 주었고, 반대로 단식투쟁 등으로 탈진해 쓰러지면 군의관이 돌보거나 군차량으로 병원에 후송시켜주기도 했다.

이렇게 군과 시민의 호의적인 모습에 악랄한 정부를 겪어 본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이 공산 국가라지만 저런 모습을 배워봄직하다’라는 여론도 생겼으나.

중국 공산당 당내 강경파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세계 언론들의 라이브 방송을 제한하고 시위사진과 인민해방군의 사진을 찍는 것을 금지하더니..

무력 진압명령을 하달한다. 그렇게 인민해방군은 전차와 총기를 동원 무차별 발포로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기 시작했고

전차와 총기 앞에 시위대는 쓰러져 나갔다.

시민들은 돌과 화염병, 전차의 진로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대항했지만..

시민들의 저항을 뚫고 천안문 광장에 진입한 인민해방군은 대학살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학생 지도층 상대로 협상을 제시한다.

인민해방군은 천안문 광장에서 조명을 모두 끄고 포위한 시위대를 향해 광장에서 해산한다면 시민들을 더 이상 죽이지 않고 진압을 끝내겠다고 말한다.

시위대 중에서 강경파를 제외한 이들은 협상을 받아들여 해산했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잔인하게 학살당한다.

그리고 시위대가 세운 거대 조형물인 ‘민주주의의 여신상은’전차로 뭉개지며 파괴된다.